등록날짜 [ 2012-03-06 18:16:03 ]
선교 비전을 지닌 윌리엄 캐리, 인도 토착어 성경책 출판
H.테일러 등 수많은 선교사 각국으로 파송, 부흥 일구다
인간의 끊임없는 갈망으로 19세기 사회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보했다. 그와 더불어 낙관주의가 등장했는데 근대 낙관주의의 등장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1815년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사회에는 별다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량생산으로 사람들이 더 많은 재화를 더 싼 값에 살 수 있었고, 기차와 증기선 발명, 농업 발달로 굶주림이 사라졌으며, 의학 발전으로 질병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가장 좋은 것이었으며 또한 가장 나쁜 것이었다.” 발전이라는 핑계로 사람들이 물건 취급을 받으며 소모되는가 하면, 유럽과 미국 사회는 백인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지구 구석구석으로 떠넘겼다.
산업혁명 이후 참혹한 노동조건은 많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면 끝없는 갈망을 충족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담뱃갑에서 시작한 운동
몇몇 크리스천은 현대 낙관주의를 ‘선교의 열정’으로 승화했다. 그 가운데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라는 영국인이 있었다. 그는 7세 때 피부병을 앓고 실내에서만 일하는 직업을 찾다가 구두수선공이 됐다.
구두를 수선하는 윌리엄의 실력은 그다지 변변치 않았다. 그는 5개국 언어를 배워서 언어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의 기술은 구두 수선 기술보다 더 신통치 않았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특별침례교회(Particular Baptist Church) 목사로 부르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설교 또한 가르치는 기술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의 설교가 목사 안수를 받을 만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26세가 되었을 때 윌리엄 캐리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도전을 하기로 했다. 바로 선교 비전이었다. 그의 결심으로 특별침례교회 선교관까지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큰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큰 것들을 시도하라!”고 자신이 설교한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캐리가 가는 길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다. 동료 목사 한 사람이 “만일 하나님께서 이교도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면 자네나 나의 협조를 구하지 않고도 그 일을 하실 걸세!” 하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이에 캐리는 그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반박했다. 그리고 마침내 캐리가 논쟁에서 승리했다. 특별침례교 사역자 12명이 캐리의 권면대로 선교회를 구성한 것이다. 사역자들은 선교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겠다고 서약한 후 그 서약서를 담뱃갑에 보관했다.
윌리엄 캐리가 걸어간 길
윌리엄 캐리와 의사 한 사람이 인도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캐리의 아내 도로시와 그의 자녀는 그 이듬해 인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또 다른 장애물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 의사가 선교자금을 횡령한데다가 캐리의 두 자녀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도 캐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선교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도로시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캐리는 7년 동안 사역한 끝에 겨우 인도인 한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당신이나 나 같았으면 어땠을까? 일찌감치 선교의 꿈을 접고 본국으로 귀환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구두수선공은 세계를 삼킬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나는 터벅터벅 걸을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든지 인내할 수 있다” 하고 말했다. 캐리는 인도 토착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 토착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신약성경을 인도인이 쓰는 24가지 토착어로 번역해냈다. 그가 번역한 인도어 성경은 미래의 인도 선교사 수천 명에게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1834년에 캐리가 세상을 떠난 후, 크리스천 선교사가 지구 곳곳에 파송되었다. 앤 저드슨과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는 불교 나라인 미얀마에서 사역했고, 정교회 성직자 존 베니아미누는 알래스카에서 복음을 전했고, 로마 가톨릭 성직자 다미엔은 하와이에서 나병 환자를 돌보다 나병에 전염되어 죽었고, 또 다른 로마 가톨릭 성직자 알레만드 라비게리에는 아프리카의 노예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설명> 허드슨 테일러와 중국내륙선교회 선교사들.
그리고 1860년,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중국내지선교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중국인에게 다가가려고 스스로 중국인이 되었다. 허드슨은 중국인처럼 변발하고 헐렁한 바지를 입었다. 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선교사가 될 수 있게 허락했다. 허드슨이 지닌 신선한 가치관은 로티 문(Lottie Moon)이나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같은 여성 사역자가 인도와 중국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
윌리엄 캐리가 죽고 나서 76년이 지났을 때, 세계 160개 선교단체 선교사 1200명이 영국 에든버러에서 모였다. 그때 이미 유럽과 미국 이외 지역 크리스천 수가 그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 담뱃갑에서 비롯한 운동의 결과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8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