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 <44>] 현대에 접어들며 세계는 점점 혼란 속으로

등록날짜 [ 2012-04-17 13:45:42 ]

공산주의자의 모진 핍박으로 러시아 정교회 무신론에 빠져
1~2차에 거친 세계대전과 더불어 유럽 낙관주의 무너지다

전 세계적으로 1억 4000만 명이 정교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러시아와 동유럽에 산다. 정교회가 이처럼 그 근거지 바깥으로 번성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세계 지도를 흘낏 보기만 해도 그 답이 나온다. 500년 동안 정교회가 번성했던 지역을 바로 이슬람교도가 다스렸기 때문이다. 이슬람교 영향으로 정교회는 동유럽과 소아시아(터키) 밖으로 뻗어 나갈 기회를 잃었다.

공산주의의 발흥
사실 러시아 정교회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압제가 발생하여 러시아 정교회 역시 밖으로 뻗어 나갈 기회를 완전히 상실했다. 1917년부터 1922년 사이에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레닌이 공산주의 러시아의 첫 독재자가 됐다. 레닌의 사고는 아주 단순했다. 그는 “러시아 인민이 심심풀이로나마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지독한 수치다”라고 선언했다. 레닌 치하에서 러시아 교회는 그 사회적 위상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때 러시아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 티콘이 레닌 정책에 반기(反旗)를 들었다가 당의 분노를 사서 러시아 정교회 주교 28명, 사제 1000명과 함께 처형됐다. 이 박해는 다음 독재자 스탈린 치하에서 더 악랄해졌다.

나중에 공산당은 크리스천에게 주택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고, 크리스천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는 교육 기회까지 박탈했다. 침례교나 오순절교회처럼 외부에서 유입한 교회들은 한층 더 가혹한 박해에 시달렸다.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주의자의 맹공에서 살아남으려고 교회 몇몇 지도자를 공산당에서 일하라고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대 후반, 공산주의가 붕괴할 때까지 러시아 정교회는 자유롭게 번성할 수 없었다. 심지어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에도 정부 지도자들은 러시아에서 기독교가 확산하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러시아 정교회
벨로루시(Belarus, 폴란드에 인접한 독립국가연합 중 하나)에서 온 침례교 목사는 러시아 정교회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수백 년 동안 정부의 일부였어요. 러시아의 영적 공동(空洞) 상태는 결국 무신론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물론 정교회에도 참된 크리스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시들고 있습니다. 러시아 기독교의 미래는 복음주의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그의 말에서 러시아 프로테스탄트의 정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1990년대 말부터 서서히 확장하고 있다. 곧 러시아 정교회가 옛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미래를 찾을 것이다.

세계대전과 자유주의 신학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칼 바르트(Karl Barth, 1886년~1968년)는 스위스 자펜빌에 있는 작은 교회 목회자였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착실하게 익힌 바르트의 스승들은 성경 구절을 낱낱이 절개해 역사적 배경을 찾는 법을 총명한 제자에게 훈련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이 보통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는 가르치지 않았다. 성경 본문의 역사적 정황과 그것이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지니는 중요성(의미)을 분리한 것이다.


<사진설명>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의 낙관주의, 자유주의 신학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으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스승들의 방법에 좌절했다. 교인에게 영적 힘을 공급하도록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로서, 이 방법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가 강단 또는 교인의 병상에서 목회적 도움을 주기 무척 어렵다”고 불평을 토로했다.

1914년, 독일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가 스위스 사회에 떠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르트의 스승들이 모두 그 성명서에 서명했다. 바르트는 질리고 말았다. 나중에 그는 “19세기 신학은 더는 내게 미래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절망에 빠진 바르트는 성경으로 돌아갔다. 과거에 그는 성경을 ‘인간적인 종교 문서’로 읽었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 향해 던지는 ‘하나님 말씀’으로 읽었다. 그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 정황과 자신의 삶의 상황을 융합하려고 노력했다.
 
1919년,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Der Roemerbrief)』를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접근 방법을 유럽 목회자에게 소개했다. 자유주의 신학을 기꺼이 버린 목회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다시 초점을 맞추었다.
 
바르트는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으로써 16세기 종교개혁가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드높였지만, 바르트 신학의 몇 가지 국면은 역사적인 기독교 신학과 다소 달랐다. 그래서 그의 접근방법이 ‘신개혁(Neo-Reformation)’ 또는 ‘신정통(Neo-Orthodox)’ 신학이라고 알려졌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 현대 낙관주의에 도취한 자유주의 신학자가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약품과 자동차를 생산해낸 그 진보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가스와 자동소총을 대량으로 생산해내고 말았다. 1000만 명에 가까운 유럽 병사가 차가운 들판에서 죽었고, 그와 더불어 유럽 현대 낙관주의도 죽고 말았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8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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