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47>] 압제 받는 자들의 편에 서서

등록날짜 [ 2012-05-08 15:01:23 ]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등 히틀러의 만행
고백교회 본회퍼, 크리스천으로서 이에 항거하다

1930년대, 어느 유명 정치가가 ‘가족의 가치’를 드높이자는 구호를 내걸고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동성애와 포르노와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침례교 세계연맹은 “그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직접 모범을 보임으로써 절제운동에 위용을 더했다”고 선언했고, 독일 프로테스탄트는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그를 적극 지지했다. 그 정치가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였다.

디트리히 본회퍼
히틀러는 민족주의 이념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럽을 신체적으로 흠이 없는 게르만족(아리안족)이 지배하는 난공불락의 제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감히 그에게 저항하는 크리스천이 없었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루터파 젊은 목사만은 예외였다.

본회퍼는 베를린에서 신학공부를 할 당시, 칼 바르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학생이자 목사인 그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928년, 그는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하려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에 본회퍼는 미국 설교자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여기 설교자들은 다양한 주제로 설교하지만, 한 가지 주제만은 아무도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곧 할렘가 흑인 교회로 갔다. 그리고 가난과 편견으로 짓눌린 사람들 속에서 뉴욕 상류층 교회 강단에서는 듣지 못한 메시지를 들었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곧 압제 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것임을 깨달았다(사 53:3~5). 그로부터 1년 후, 본회퍼는 “나는 이제야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말했다.

고백교회
본회퍼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히틀러는 독일에 있는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친(親)나치’ 교파로 흡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1934년, 칼 바르트를 포함한 크리스천 5000여 명이 나치 정책에 항거하고자 독일 바르멘에 모였다.

그들은 ‘바르멘 신앙고백서(Barmen Confession)’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히틀러에게 불순종하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다짐했다. 그 신앙고백서에 서명한 이들이 세운 교회가 바로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다.


<사진설명> 히틀러는 독일의 모든 개신교를 나치파에 흡수하려 했으나 본회퍼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가 이를 반대하면서 큰 시련을 겪는다.

이때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고백교회를 위한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를 20세기에 적용하려는 대담한 시도인 『제자도의 대가(弟子道의 代價, The Cost of Discipleship)』를 저술했다.

1930년대 중반, 히틀러의 날카로운 발톱이 고백교회를 할퀴기 시작했다. 나치는 대학교수들에게 히틀러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라고 명령했다. 칼 바르트가 이를 거부하자 나치가 그를 추방했다.

이어 나치는 고백교회 목회자들을 향해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짐하라고 명령했다. 본회퍼가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했지만, 고백교회 목회자들은 나치의 명령에 감히 항거하지 못했다.

1938년, 17세 유대인 소년이 독일 하급관리 한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히틀러가 그토록 고대하던 핑계거리를 제공해주었다. 나치 병사는 수많은 유대인 가정과 회당을 파괴하여, 단 하룻밤 만에 유대인 3만여 명을 살해 또는 체포했다.

이때 이 학살에 공개적으로 저항한 사람은 본회퍼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위해 저항하는 사람만이 찬송을 부를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을 포함한 몇몇 크리스천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했다. 교황 피우스 11세는 ‘가슴을 태우는 슬픔으로’라는 편지에서 히틀러가 자행한 죄악에 항의했고, ‘생명의 법인 십계명’이란 제목의 로마 가톨릭 문서는 유대인 대학살을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교황 피우스 12세는 유대인 도피자를 바티칸에 숨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인은 대부분 히틀러의 극악무도한 짓을 모른 체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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