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5-15 13:41:36 ]
복음 전파를 향한 여러 노력은 계속되고 있어
시대에 따라 가치관은 바뀌어도 진리는 불변
크리스처니티 투데이 발간
1953년 어느 날 새벽 2시, 빌리 그레이엄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생각은 전 세계 모든 영어권 복음주의자를 하나로 불러 모았다. 빌리 그래함은 “복음주의 관점에서 모든 극단을 피하는 잡지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로부터 3년 후,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지(誌)가 인쇄소 롤러를 타고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도 복음주의자에게 진지한 대화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사진설명> <크리스처니티 투데이> 표지
1974년, 빌리 그레이엄은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의장이 됐다. 복음주의 크리스천은 그 회의에서 발표한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에서 “복음이 우리를 하나로 부른다”고 고백하는 한편, 선교사들에게 원주민의 문화를 존중하라고 촉구했다.
복음주의가 점차 성장하자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도 점점 벌어졌다. 어떤 근본주의자는 성경을 새로 번역하는 일, 록 음악, 현대 유행 등과 맞서 싸우는 데 전념했고, 또 다른 근본주의자는 성경에 충실하면서 읽기 쉬운 성경, 현대적인 찬송가, 로마 가톨릭과 대화 등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명
1990년대에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란 용어보다 더 많이 사용한 용어도 없지만, 또 이 용어보다 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용어도 없을 것이다. 다만 ‘포스트모던’은 미래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에 새로운 세계관이 나타났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는 풍요의 늪에 빠졌다. 표면적으로는 모두 부유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표면 아래에서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있었다. 각양각색 인종으로 구성한 미국 군인은 전쟁하는 동안 같은 봉급을 받고 같은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인종차별이 세도를 부리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침례교 목사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은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미국의 편견에 평화롭게 대항하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곧 베이비 붐 세대(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이후부터 1965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가 인종편견, 애국심, 말끔한 복장, 하나님과 교회에 관한 전통적 생각을 포함해 그들의 부모들이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수용하던 것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시기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경제공황과 두 차례 세계 전쟁이 현대 낙관주의를 매장해버리자 그보다 조금은 제한적인 새로운 낙관주의가 등장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집중했다. 성(性)의 자유를 신봉하자 AIDS를 경험했고, 강력한 군대를 신봉한 나머지 전 국민이 부채를 떠안게 됐고, 돈을 신봉하느라 대출 총액이 저축 총액을 초과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런 정황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등장했으며, X세대는 이 포스트모던의 제2세대가 되었다. 긍정적으로 보았을 때,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다양한 각도에서 삶을 조망하도록 사람들을 자극했다. 부정적으로는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장려했다.
21세기 크리스천은 이런 포스트모던 세계관이 부분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계몽주의가 표방한 말과 논리와 이성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개인의 감정과 체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며, 때로는 한 가지 견해보다 두 가지 이상의 견해가 타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개인의 체험과 감정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압도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슬람교와 다른 종교들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이때에 크리스천이 자신의 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동료 크리스천뿐 아니라 전혀 다른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이해하는 일은 매우 긴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끝>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교회역사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8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