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공산주의자, 기독교를 철저히 유린하다

등록날짜 [ 2012-06-19 11:17:32 ]

겉으로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처럼 보이나
영적으로는 교회 파괴에 있음을 알아야

6.25전쟁이 발발하고 몇 달 후 유엔군 개입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진행돼 서울 수복이 눈앞에 오자 공산당은 숨어 있던 목사들 검거에 혈안이 됐다.

김인선, 김윤실 목사는 유치장에서 순교했고 나머지 목사들은 대부분 공산당에 의해 납북(拉北)하는 비운을 겪었다. 장로교회 송창근, 남궁혁, 김영주, 유재헌 목사 등과 감리교 김유순 감독을 비롯하여 양주삼, 방훈, 김희운, 조상문 감독, 성결교회 박현명, 이건 목사, 구세군 김삼석, 김진하 사관 등 60여 명이 납북(拉北)해 현재까지 그 생사도 알 수 없다. 또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학살당한 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순교의 반열에 오른 이들
박경구 목사는 황해도 장연 서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는 교육계에 투신했다가 느지막이 목회를 시작했다. 박 목사가 진남포 득신소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그 학교 교사로 있던 강양욱이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고 협박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박 목사는 6.25가 터지던 날 주일 새벽에 체포되어 쇠줄로 양 손목과 발목이 묶여 끌려갔는데 후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무참히 절단된 시체로 발견됐으며, 같이 살해된 교인들은 입이 흙과 재로 틀어 막힌 채 시체로 발견됐다.
 
이북에서 순교한 이들 중 꼭 기억해야 하는 인물 가운데 주기철 목사가 섬긴 산정현교회 유계준 장로와 백인숙 전도사를 빼놓을 수 없다. 유 장로는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그 가족에게 자비로 생활비를 지급했고, 해방되고 나서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주 목사 가족과 자기 가족을 먼저 남한으로 피난하게 하고 혼자 교회를 지키다 공산당에 순교 당했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목사 없는 성도를 안정모 사모와 함께 심방하며 돌보았는데, 결국 공산당에 순교를 당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신당동중앙교회 안길선 목사, 김예진 목사가 순교했고, 서대문감옥에서 주채원 목사 등이 순교했으며, 김응락 장로는 영락교회 앞에서 순교했다. 김인룡, 김윤실 목사 등은 서대문감옥에 갇혔다가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순교했다.

전북 옥구군 미면 원당교회 교인 75명 중 73명은 한꺼번에 살해됐다. 전북 삼례교회 김주현 목사는 그의 가족 7인과 함께 순교했고, 광주 양림교회 박석현 목사가 순교할 때 그의 장모, 부인, 외아들까지 공산당에 살해당하였다.

황해도 봉산 계동교회 180여 교인 중 175명이 나무로 된 예배당 안에 갇힌 채 태워 죽임을 당했다. 대전교도소에는 남한 각지 교역자, 평신도 수백 명이  투옥해 있었는데 공산당이 후퇴 직전에 감옥에 불을 질러 이들 모두 소사(燒死)하게 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통계일 뿐 실제는 이보다 더 큰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군목(軍牧) 제도의 시작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는 6.25전쟁으로 심한 타격을 입었으나 그 후 더 큰 성장을 보인다. 특히 군대 선교가 시작되면서 많은 장병이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후로 신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제대한 후 고향에 돌아가 계속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한국교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군목제도는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다. 일본강점기 말엽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선교지를 떠난 선교사들이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해방을 맞아 다시 선교지로 돌아왔다. 그들은 미(美) 군정청(軍政廳) 여러 요직에서 활동하고 군목으로 복무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군정청은 한국 군대 훈련을 지도하려고 ‘미국 군사고문단’을 조직했는데, 이 본부는 대구에 있었다. 이때 대구 지역 장로교회가 차태화 목사와 캠벨 목사를 훈련병에게 파송하여 신앙 지도를 한 것이 한국 육군 군목제도의 효시(嚆矢)다.

1949년 5월 차 목사는 한국 육군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다. 1950년 6.25가 일어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애덤스와 캠벨은 고문단 참모부에 군목제도 신설을 청원했다. 그러나 참모부가 이를 무시하여 실현하지는 못했다.

1950년 9월 캠벨이 일본에 갔을 때 미군 사령부 군종참모로 있던 벤넷 대령을 만나 한국 군목제도 신설을 청했다. 벤넷은 이를 좋게 여겨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맥아더가 연합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진주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군목제도의 허락을 받아냈다.

해군에서는 군목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1948년 당시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이 정훈장교 형식으로 해군 내에서 목사들을 일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장로교회 권연호, 감리교회 나사행, 성결교회 최정원 목사 등 교계 인사들 역시 이 제도의 정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언하여 재가를 얻었다.

1951년 정월 감리교 선교사 쇼와 가톨릭 선교사 캐럴 신부는 대구에 군목학교를 개설하라는 명을 받고 개교를 서둘렀다. 1951년 2월 제1회 군목학교 졸업생 39명을 배출했다. 그리고 1954년에 정식으로 군목을 장교로 임관했다. 이러한 군목제도를 실현한 것 역시 그 어느 선교지에서도 없던 최초의 사건이었다. 군목제도가 법적으로 확립한 것은 1961년 4월 군목 신분령에 관한 국무원령 제234호에 의해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9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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