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신사참배 강요에도 굴하지 않은 신앙 절개

등록날짜 [ 2012-08-14 09:44:20 ]

일제 치하에 교단마다 믿음 저버리고 신앙 굴복
그래도 순교 정신은 곳곳에 남아 명맥을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한국교회는 적극적인 친일화로 변질되었다. 그 이유는 일제의 압력이 더욱 거세졌고, 민족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제의 신사참배 문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38년 2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장로교 노회로서 교권의 중심지였던 평북노회가 노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신사참배에 굴복했다. 총대들은 총회가 끝난 후 남산에 가서 신사참배를 하였다.<사진 참조>


<사진설명> 신사참배 모습. 일본은 매년 9월6일 애국일로 지정 신사참배 강요했다.

그해 5월에는 ‘경성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었고 7월에 ‘조선기독교연합회’로 확대 개편하면서 일본적 기독교를 표방하게 되었다. 9월에는 한국교회의 정통성 있는 연합기구였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NCC)가 해체되었다. 이것은 연합기구에서 선교사들을 배제하고 친일화한 연합기구가 탄생되었음을 의미한다.

1939년 9월 장로교 제28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나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조직했다. 이것은 일제의 정책을 교단으로 지시하는 기구였다.

1940년 9월 일본기독교연합회장 아베가 내한하여 조선 기독교는 황민화 시책을 따라 교파를 합동하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정부 시책에 따라 일본 그리스도교단을 창립하였다.

1942년 1월 교파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43년 1월 ‘조선기독교 합동준비위원회’가 열렸다. 일제가 교파통합을 추진한 것은 기독교를 단일화하면 훨씬 더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경기노회 전필순 목사와 감리교회는 친일적인 ‘혁신 기독교단 12개조 혁신안’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유대 사상을 제거”하고 “구약성서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 시기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독일은 반셈족주의와 아리안 우월주의를 내세워 유대인을 박해하고 성경에서 구약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혁신교단 추진 지도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상을 한국교회에 적용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교계의 큰 반발을 사 혁신교단 논의는 다행히 없어졌다.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
1934년 장로교 총회는 이인식 목사 명의로 2차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 저지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수차례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구류 취조를 받았다.

1939년 2월 박관준 장로는 일본정계 요로와 제국회의에 호소할 목적으로 안이숙과 함께 도일(渡日)하였다. 그들은 제74회 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서 경고서를 투척하였다. 그 내용은 ① 종교법안제정 반대, ② 국교를 신도에서 기독교로 할 것, ③ 신사참배 강요와 양심적 교역자 구속 철회 등이었다.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한 의로운 행동이기는 했으나 일본 국회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1938년 8월 김선두 목사는 일본에 가서 정계와 군부 요인을 만나 총독의 신사참배 결의를 막으려 했으나 발각되어 구속되었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로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항하고, 불의를 경고하였다. 이들의 신앙적 용기는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
주기철은 1897년 경남 창원군 웅천읍에서 주현성 장로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탄생했다. 그는 오산학교를 졸업 후 연희전문상과를 다니던 중에 안질 악화로 귀향했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중생을 체험했다.

<사진설명>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1921년 평양 장신 재학 중에 평안도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1926년 30세에 부산초량교회에 청빙을 받았고, 1931년 마산문창교회로 이전하여 부흥사로 명성을 얻었다. 부인을 잃고 마산의신여학교 오정모와 결혼했다.

1936년 그는 송창근 목사 후임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1938년 2월 주 목사가 검거되자 교회는 담임 목사 없이 헌당식을 했고,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주 목사는 석방되었다. 주 목사는 1937년 7월 유재기 목사의 ‘농우회’ 사건에 연루해 7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는 감옥에 있을 때 순교를 준비하면서 ‘5종목의 나의 기도’를 하였고 그것을 설교하기도 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1940년 주기철 목사는 다시 체포되었고, 평양노회 노회장 최지화 목사는 평양감옥에 찾아와 주기철 목사에게 목사 사직서를 강요했으나 주 목사는 거절했다.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를 제적하였고, 평양경찰서는 평양노회의 결의를 따라 주 목사 가족과 세간을 끌어내고 교회를 폐쇄하였다.

1944년 4월 21일 오후 9시 “내 영혼의 하나님여 나를 불러주시옵소서”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주기철 목사는 나이 47세에 순교하였다.               

위 글은 교회신문 <30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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