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서(3)] 일제강점기와 전쟁 중에서도 살아남은 교회 터

등록날짜 [ 2013-08-20 17:15:26 ]

100년 넘는 세월에도 설립 때 모습 그대로 유지
유일한 一자형 한옥 교회, 건축사적 중요한 유산


<사진설명> 지은 지 100년이 넘는 영천 자천교회. 1903년 권헌중 장로가 설립한 한옥 구조의 교회로,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번지에 있는 자천교회는 지은 지 100년이 넘는 교회당으로, 목조 한옥 구조로 되어 있다.

마을 이름 자천은 원래 자모산(보현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이름에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을(乙)자형으로 흐른다는 뜻을 합하여 ‘자을천’이라 했다가 차츰 ‘자천’으로 불렸다고 한다.

자천교회는 대구 선교부 아담스 선교사와 연관이 깊다. 1897년 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권헌중은 식솔을 이끌고 대구로 이사하던 길에 아담스 선교사를 만났다. 미국 선교사를 처음으로 본 가족들과 머슴은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권헌중은 아담스가 전한 복음으로 예수를 만났다.

복음을 들은 권헌중은 대구로 가는 계획을 포기하고 영천 화북면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초가를 구해 낮에는 학동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아담스와 성경공부를 하며 1898년에 가정 예배를 드렸다. 공식적인 교회 설립일은 1903년 4월 1일로, 현재 남아 있는 예배당은 1904년에 완공했다. 당시 주민이 반대해 예배당 짓는 일은 쉽지 않았다. 권헌중은 마을에 주재소(파출소)와 면사무소를 지어 줄 테니 교회도 짓게 해달라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겨우 예배당 건축 허락을 받았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
권헌중 장로는 교회 신도에게 양반과 상놈의 구분을 철폐하자고 자주 주장했다. 애초 예배당이 지어졌을 때 그 교회를 채운 이들이 머슴과 노비이던 일을 늘 고마워했다. 이런 주장이 먹혀들었는지 교회에는 ‘상놈’ 신자가 늘어났다.

사람들은 못마땅해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상것들을 하나님 자녀로 섬기는 권헌중의 태도는 어쨌든 충격이었다. 권헌중은 섬기는 행동으로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없애 나가는 계기로 삼았다. 이러한 성심과 더불어 계몽과 교육 사업 그리고 종교 활동으로 조선 사회에 뿌리내린 여러 문화적 충돌을 완화하고 절충해나갔다.

자천교회는 점점 더 번창해갔다. 그리하여 권헌중은 1922년 2월 26일 자천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는 이를 발판으로 헌신과 나눔의 활동 폭을 넓혀갔다. 심지어 자천교회를 넘어 경북노회에 이르기까지 확장해 나갔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 설득력 있는 설교 말씀을 전했다. 유창한 언변으로 신앙을 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했고, 아울러 교육 사업도 진행해 민족의 밝은 미래를 여는 토대를 마련하려 애썼다.

때때로 일제가 핍박하여 교회를 억눌렀으나 타협하지 않았다. 예배 시작 전에 천황폐하를 숭배하는 의식을 먼저 치르라는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어떤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온몸으로 교회의 위상을 지켜냈다. 그렇게 이 땅을 복음화하려는 밀알 한 알로 자신을 내놓으며 민족교회의 터전을 닦고자 헌신하던 권헌중은 1925년 열정적인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했다.

전국 유일의 전통 한옥 교회당
자천교회는 초기 한국 교회 형태인 ‘ㄱ’자형이 아니라 국내 유일의 겹집 구조인 ‘일(一)자’ 형태로 지어졌다. 국내에는 지은 지 100년을 넘긴 교회가 400여 곳 있지만, 옛 모습을 온전히 지닌 교회는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특히 건물 구조가 독특하다. 예배당 지붕을 넓고 평평한 ‘우진각’ 형태로 얹었다. 이런 형태는 전통 한옥 대문에 흔하지만 독립건물에는 잘 쓰이지 않았다. 기와지붕을 인 목조 예배당에 들어서면 일(一)자형 공간이 완연하다.

지붕 위에 평평한 공간이 있는데, 6.25전쟁 때 미군이 공중에서 폭격하지 못하게 하려고 횟가루로 ‘CHURCH(교회)’라고 표시해 성전을 지켰다는 일화가 전한다.

교회 오른편에는 ㅁ자형으로 배치한 신성학당 건물이 있다. 본래 ㄷ자형 배치였으나 교회 증축으로 ㅁ자형으로 바뀌었다. 권헌중 장로가 살던 집은 요즘은 ‘처치 스테이(Church Stay)’를 한다. 또 기도실, 별빛문고, 역사자료실 같은 다양한 쓰임새로 활용하고 있다.

교회 옆에 있는 작고 아담한 굴뚝과 종탑이 지닌 독특한 모습도 인상적이다. 작은 굴뚝은 연기가 높이 피어오르는 현상을 막아 준다. 예배당 앞뜰 사철나무 아래에는 권헌중 장로가 묻힌 무덤과 기념비가 있다.


<사진설명> 자천교회 내부.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할 수 있게 좌석 가운데에 칸막이가 놓였다. 출입문도 따로 만들어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기둥 네 개가 가운데 줄지어 서 있고, 나무로 만든 칸막이가 기둥과 기둥을 이어 준다. 휘장이 아닌 칸막이를 친 데에는 남녀가 유별하다 못해 아예 서로 다른 공간에서 예배하게 하려던 의도가 엿보인다. 당시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시대적 상황을 반영했다. 출입문도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 신도가 따로 드나들게 각각 냈다.

천장 위 대들보는 활처럼 휘었다. 예배당 안에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조사가 잠을 자던 방이 2개 있다.

교회 옆에 세운 한옥 건물인 신성학당은 과거 권헌중 장로가 교회 내 설립한 신성학교의 정신을 이어 세운 전국 유일의 전통 한옥 교회당으로, ‘ㅁ’자 구조를 지닌 전형적인 한옥이다. 이 때문에 자천교회는 개신교와 국내 건축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52호이고, 한국 기독교 사적 제2호로 지정될 만큼 귀중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5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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