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전 교인 니느웨 금식 기도회’를 앞두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금식의 비결

등록날짜 [ 2012-09-11 14:31:24 ]

한시라도 목적을 잃어버려서는 안 돼
육신의 요구를 제어하며 나를 죽여야
주님의 심정이 나타나면 올바른 금식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여 하나님을 만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만나 주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며 하나님을 만나려 몸부림을 쳤으나 그 최후 수단마저 하나님께서 거절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금식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첫째는 금식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고, 둘째는 금식하기 전에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죄를 회개하여 그 죄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금식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철저하게 알아 반드시 응답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금식이 될까?

목숨과 응답을 맞바꿀 각오로
금식은 먼저 육신이 죽어야 한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 육신이 기가 죽어서 완전히 힘을 잃고 움직이지 못하니 어떻게 육신에게 권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금식은 육이 죽어야 한다.

금식은 응답받겠다는 최후 수단이며,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서원하는 것과 똑같다.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의 응답과 바꾸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사흘 금식은 아무 것도 아니니 억지로라도 굶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금식하면 그 금식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으니 응답해 주세요’ 하고 하나님께 하는 확실한 선전포고가 금식이다. 그러므로 금식할 때 산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고 금식해야 한다. 자기의 목숨과 응답을 바꾸겠다는 금식기도야말로 하나님을 놀라게 하는 기도다.

또 한시라도 금식하는 목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자고 일어나서도 바로 ‘주님, 이 문제에 응답해 주세요!’ 하고 기도할 정도로 기도응답에 절실히 매달려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식의 목적을 잊어버렸다고 책망한 바 있다.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사58:3~4).

그것은 아무리 금식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얘기다. 목적이 없는 금식은 하나마나다. 밥만 굶고 고통스럽다.

먼저 죄를 회개하라
금식할 때는 하나님과 사이에 가로막힌 죄를 다 회개하고, 사람 사이에 막힌 모든 죄를 회개해서 다 헐어 놓고 해야 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하나님과 사이에, 사람과 사이에 가로막힌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응답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모자식간에 갈등이 있거든 다 풀고 나서 금식을 해야 한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인다고 말했으니 철저하게 풀어놓으면 바로 우리에게 유익이다(마18:18). 땅에서 풀면 하나님도 매인 것을 풀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절 오락하지 마라
금식하는 동안은 오락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텔레비전도 보면 안 된다. 금식하는 동안은 받아야 할 응답의 문제를 잊어버리면 큰일 난다. 항상 응답 받아야 할 문제를 들고 있어야지, 그것을 잊어버리고 텔레비전을 보고 오락하다가 자칫 위대한 응답을 뺏겨 버릴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정신이 빼앗긴 금식은 안 받으신다.

이성간에 만나는 것도 금식 기간에는 삼가야 한다. 남녀가 만나 데이트하다 보면 서로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금식하는 목적과 응답받아야 할 목적을 잊어버리기 쉽다. 하나님은 목적 없는 금식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절대 목적을 잊어버리지 않는 순수한 금식을 해야 한다. 그래서 금식은 꼭 준비기도가 필요하다.
 
금식하는 티를 내지 말라
많은 사람이 얼굴에서 금식하는 표를 낸다. 그 사람이 금식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금식하니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금식하는가? 금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겨냥해야 한다. 과녁을 맞혀야 점수가 나오는데 화살을 과녁 밖으로 날려버렸다면 누가 점수를 주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을 겨냥하지 않는 금식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바리새인이 하는 금식은 하나님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대우를 받으며, 저렇게 열심히 말씀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잘하기에 우리 민족이 이나마 평안하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금식하는 모습을 사람 앞에서 자기 의로 드러냈다.

기도도 길거리에 나가서 “하나님이여 우리는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는 십일조를 잘 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세리와 같이 우리는 간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며 크게 기도했다. 많은 사람이 듣고 자기를 우러르고 존경하기를 바라서 그러는 것이다. 이런 것은 금식과 기도의 겨냥 자체가 사람이므로 그 기도와 금식에 하나님이 응답해야 할 이유가 없다.

금식하는 일을 남편도 모르게, 아내도 모르게, 자식도 모르게 하라. ‘주여, 힘 주시옵소서.’ 오직 내 목적이 달성되기를 원한다면 금식하는 티 내지 말고, 최고로 건강하게, 누가 봐도 금식하는 줄 모르게, 보이지 않게 하라.

보식도 금식이다
금식하는 동안만 금식이 아니다. 보식 역시 금식이다. 금식은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는 것이다. 보식은 많이 먹고 싶은 욕심을 금하는 금식이다. 한 수저 더 먹고 싶은 욕구를 금하는 금식이다. 그 금식이 또 얼마나 어려운가? 금식하고 나서 많이 먹어서 몸이 부었다면 금식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보식할 때도 금식과 똑같이 목적을 잊어버리지 말고 해야 한다.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보식을 통해서 응답받아야 한다. 보식 때 절대로 밥 욕심을 부리거나 굶은 양을 채우려고 몸부림을 치거나 그저 한 수저라도 더 먹으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금식이 끝났거든 아무리 배고파도 상대방의 배고픈 것도 생각하고 저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고 나보다 상대를 우선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죽어도 인류를 구원해야 되듯이 이 심정이 오는 순간 당신에게 응답이 온 것이나 똑같다.

보식은 이만큼 중요하다. 오늘날 밥만 굶고 보식하면서 밥을 먹고 퉁퉁 부어 있다. 왜 부었냐고 하면 잘 때 먹어서 그렇다고 한다. 사흘 금식 사흘 보식을 철저하게 해서 금식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응답이 되었다고 고백하기를 바란다.

금식 응답은 바로 주님 심정
주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이 풀어지고, 멍에의 줄이 끊어진다. 오늘까지 수많은 무거운 짐을 지고 앞을 걸어갈 때 이 짐을 멍에에서 풀어주고 자유케 해야 한다.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받으신다면 이렇게 하시겠다고 했다.

빈민을 보면 주고 싶은 생각이 나고, 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싶은 생각이 나고, 예수 안 믿는 골육 친척을 바라볼 때 구원하고 싶은 생각이 난다. 금식을 마치고 주님 심정이 나타나거든 금식이 상달된 줄 알고, 금식 마치고 주님의 심정이 안 나타나면 상달 안 된 줄 알아야 한다.

금식의 응답은 바로 주님 심정이다. 육신 속에 있는 ‘나’라는 근성이 무너지는 순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심정이 발동한다. 내 안에 있는 주님이 일하고 싶으나 나라는 존재가 억압하고 가로막아서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손 놓고 주님이 내 안에서 드러날 때 드디어 주님의 역사, 주님의 생애가 드러난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금식한다.

그리고 금식에 성공한 자는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8~9) 하셨으니 금식의 성공 뒤에는 기도 응답이 계속 따른다.

기도로 금식에 성공한 자는 하나님이 계속 보호하신다. 이 금식의 성공 뒤에 주님의 호위가 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도 응답된다. 금식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죽느냐 사느냐, 이렇게 위대한 것을 얻느냐 빼앗기느냐, 바로 이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30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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