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27주년 기념 대담] 영혼 살리려는 열정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어

등록날짜 [ 2013-03-20 16:11:35 ]

언제나 습기 가득한 지하 성전이지만 영적 부유함만큼은 최고였던 시절
예나 지금이나 ‘오직 예수’만을 전하는 주의 종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

우리 교회는 1986년 3월 15일 연희동에서 개척하여 올해로 설립 27주년을 맞는다. 교회신문 <영혼의 때를 위하여>에서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27년 전 연희동에서 담임목사와 함께 개척교회를 섬겼던 성도들을 만나서, 개척 당시에는 예배가 어떠했으며 그때의 성도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알아보았다. 당시를 돌아보며 지금의 내 신앙생활은 어떠한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사진설명> 연희동 시절 사람들. 왼쪽부터 우지선, 백명희 권사, 심광성 안수집사, 오숙정 권사, 백미현 권사, 배영문 안수집사.

열악해도 열정만큼은 최고였던 시절
■ 심광성 안수집사(1986년 출석)

연희동 성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람이 올 곳이 못 되는 지역에 있었어요. 연희동 성전에서 연세대학교까지 약 1킬로미터 정도 거리인데 그 중간에 아무런 건물도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다닥다닥 집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유한 동네라서 으리으리한 집들이 뜨문뜨문 있었어요.

그런 곳의 외진 모퉁이, 평지도 아니고 약간 비탈길에 있는 지하실이었어요. 환풍기도 하나 없었던 것 같아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니 그 비가 다 성전으로 들어오고, 그 물을 다 퍼내고 나면 젖은 곳에 곰팡이가 펴서 정말 냄새가 심했어요. 그래도 어디서 오는지 자꾸만 몰려든 성도로 인해 성전이 비좁아 긴 의자에 빈 공간 하나도 없이 빼곡히 들어앉아 정말 콩나물시루 같았어요.

공기가 전혀 안 통하는 지하인데다가 몰려든 성도들이 하도 많아서 성전이 터질 듯해 예배를 마치고 나면 겨울인데도 땀으로 범벅이 됐죠.

어느 예배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성도들이 성전건축헌금 작정이라도 해 보자고 하자 목사님께서 허락하셔서 성전 건축헌금 작정을 했는데 집을 내놓겠다는 분도 있고, 전세금을 다 드리겠다는 분도 있고, 전세를 빼서 헌금으로 드리고 월세로 가겠다는 성도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삽시간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성전 부지를 계약하고 망원동 성전으로 이사 가게 되었죠.

예배에 목숨 걸던 그때 그 시절
■ 오숙정 권사(1986년 3월 출석)

제가 우리 교회에 왔을 때가 1986년 3월이었어요. 저 혼자 교회 다녔는데 남편이 출석하면 함께 등록하겠다고 한 것이 9월에서야 우리 교회 등록 교인이 되었죠.

교회에 처음 왔을 때 바닥은 물이 샜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으로 큰 솥을 걸어서 부엌을 만들어 금요철야나 주일예배 후에 국수를 끓여 먹었어요. 국수라고 해봐야 멸치육수를 넣은 물 국수에 김치 하나 곁뜨린 것뿐이죠. 어쩌면 걸인의 찬 같았지만 다들 참 맛있게 먹었어요. 부엌이래 봤자 조그맣게 있었으니 설거지는 뒤로 가서 했는데, 그 물을 버릴 곳이 없어 위에서 모터로 빼냈죠.

저는 주일이 가장 행복했어요. 하루 종일 은혜 받을 수 있었으니까. 비만 오면 교회 바닥이 물에 흥건히 젖어 방 두 칸 모두 물건을 놓을 수도 없었어요. 방석을 깔아 놓아도 축축하긴 마찬가지였죠. 벽에는 커튼을 쳐 놨는데 제쳐 보면 역시 곰팡이가 있고 역겨운 냄새가 나기도 했어요. 망원동으로 이사하기 전에는 복도, 강대상 아래 등 공간이 있는 곳마다 방석을 깔고 예배드리던 모습이 정말 진풍경이었어요.

1987년에는 제가 처음 1여전도회장 직분을 받았어요. 지금은 상.하반기에 결산하며 하는 감사예배를 그때는 매월 여전도회가 돌아가면서 했어요. 감사예배를 드린 후에는 여전도회에서 성도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고요. 저녁예배를 드리고 철야 기도까지 하는 성도들이 많았으니까요.

1986년에 처음 하계성회를 생수기도원에서 했어요. 회비 만 원 외에 각자 쌀을 어느 정도씩 가지고 갔어요. 우리 교회 성도라면 어린아이들까지 무조건  모두 다 갔죠. 월요일부터 시작하면 금요일 오전까지 성회를 하고, 급하게 교회로 와서 금요철야예배를 또 했어요. 금요철야예배도 보통 새벽 2시나 3시쯤에 끝나곤 했죠. 그것은 매월 교회에서 하는 성회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시절 성도들은 아이들까지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에 힘썼어요. 그 말은 아이들도 함께 온전히 예배하도록 교육했다는 겁니다. 요즘은 교회 환경이 최고로 좋다고 할 수 있는데, 어린아이들 관리가 좀 미흡한 것 같아요. 부모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으로 훈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밖에 방치하거나 말씀 중에 돌아다녀 옆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잘 교육을 했으면 좋겠어요.


<사진설명> 연희동 성전 시절 성전 외부와 내부 모습.

당시 기도했던 제목 그대로 이루어져

■ 백미현 권사(1986년 1월 개척 준비부터 출석)

우리 교회 설립기념일은 1986년 3월 15일인데, 저는 개척 준비로 가정집에서 예배드리던 2~3개월 전부터 언니 둘과 동생이랑 같이 예배에 참석했어요. 그 당시 30여 명이 예배드리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설교 말씀에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특히 매일철야에서 밤 11시에 한 시간씩 전해 주시는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날마다 가서 설교 듣고 기도를 했어요. 그때 목사님께서 믿음의 통이 얼마나 큰지 엄청난 스케일로 말씀을 하셨죠.

한번은 연희동에서 1년인가 2년인가 되었을 무렵인데, 목사님께서 개척 전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름철에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 가면 수박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쭉 늘어진 이상을 보여 주셨다는 거예요. 장차 우리 교회도 성전을 얼마나 크게 짓느냐면 강단에서 성전 저 끝에 있는 성도의 얼굴이 안 보여 사람 머리가 마치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늘어놓은 수박통처럼 쫙 늘어설 정도로 대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또 지금은 목사와 이렇게 가깝게 지내도 나중에는 자주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그렇게 통 큰 말씀을 하시자 어떤 사람은 내심 ‘피식’ 비웃음을 치기도 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60평 남짓한 지하실 교회도 세 들어 있는 형편이고, 그나마 비만 오면 물이 나고 기도할 공간도 없어서 장의자를 뒤로 밀어 놓고 기도했으며, 사택도 따로 없어 교회 한쪽을 칸막이로 쳐서 사택으로 사용하는 형편인데 그런 말씀을 하니 여러 사람이 허풍으로 들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당시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분명히 말씀대로 될 것으로 믿었어요. 당시에도 믿음 있던 성도의 기도 제목이 바로 ‘우리 목사님, 세계적인 목사님 되게 해 주세요’였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져 지금 세계 방방곡곡에 다니시면서 구령의 열정으로 목회자를 깨우고 평신도를 깨우는 큰일을 하시고 계시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돌이켜 보니 기도밖에 없더라
■ 백명희 권사(1988년 3월 출석)

설립 2주년 감사예배 때 연세중앙교회에 처음 왔습니다. 얼마 후 불신자인 남편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가게 됐는데, 담임목사님께서 우리 집에 심방을 오셔서 예배드려 주셨어요. 남편을 외국에 보내 놓고 매일 밤 목동에서 연희동까지 철야 기도하러 갔죠. 밤 11시에 말씀 한 시간 듣고 12시 반쯤에 기도를 시작하면 새벽예배 시작종을 칠 때까지 계속하는데, 평소 말씀 시간에는 가끔 졸아서 목사님께 지적받던 제가 매일철야기도 시간에는 어찌나 기도가 잘되는지 ‘어, 벌써 기도 시간이 끝났나?’ 할 정도로 네 시간이 금세 지나갔어요.

하지만 기도하다가 졸면 어김없이 사모님이 돌아다니며 깨워 주시고, 영적으로 혼탁하거나 죄지은 사람은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바로 기도를 해 주시곤 하여 매일 영적인 점검을 받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모하며 기도를 시키시더니 남편이 두 번 외국에 나갔다 돌아와서부터는 우리 교회에 등록해 지금까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지금은 안수집사(우병조 안수집사)에 남전도회 기관장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연희동 시절에 저를 불러 기도시키셔서 우리 가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어려움 이기고, 우리 교회에서 충성하고 전도하며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기도의 힘인 것 같아요.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기도할 수 있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할 뿐입니다.

영적으로 순수했던 그때
■ 우지선(1988년 3월 출석, 당시 7세)

성전이 연희동에 있을 때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목동에 살던 터라 엄마(백명희 권사) 손을 잡고 버스로 교회에 가곤 했죠. 지하 성전으로 내려가면 어둡고 습했던 느낌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20여 년이 지났지만 눅눅하고 꿉꿉하여 답답한 느낌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래도 작은 지하 성전에는 매일 철야로 기도하시던 분들이 있었고, 예배당 옆에는 방이 하나 더 있어 그곳에서 목사님과 사모님이 기도해 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지하 성전에서 윗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주일학교 모임 장소가 있어요. 일반 주택이었는데, 거기서 모임을 열어 20~30명 정도가 성경공부를 했어요. 여름성경학교도 교회에서 하고 지금과 같이 담임목사님이 은사에 관해 설명해 주셨는데, 그 당시 방언 은사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성도가 지금처럼 많지 않으니까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가정마다 심방하시고 그 가정의 영적 상태도 세세하게 관리해 주셨어요. 당시 일곱 살이었는데, 교회 가기 전에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혼난 적이 있거든요. 근데 예배하러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어찌 아셨는지 설교 말씀 시간에 저보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고 하셨어요. 그 정도로 깊이 있는 영혼 관리를 받았고, 복 되게 신앙생활을 했어요.

나이를 먹어 되돌아보면, 당시 목사님과 사모님께서는 밤늦게까지 심방하고 새벽까지 말씀 전하시는 등 성도를 향해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던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 후로 교회가 점점 커지니까 목사님을 가까이서 뵙거나 이야기할 시간도 많이 줄어 아쉬움이 많았는데, 최근 목사님께서 결혼식 주례를 해 주신 덕에 목사님을 가까이서 뵈니 옛날 생각이 나고 참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기도해주시고 이끌어주신 감사가 밀려 왔습니다.   

늘 성령 충만을 유지했던 시절
■ 배영문 안수집사(1990년 출석)

제가 연희동 시절에 교회를 다니던 무렵에는 청년회가 1청년, 2청년, 3청년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3청년은 제일 나이 어린 20~23세, 2청년은 중간 나이로 24~27세, 3청년은 청년회 큰형님뻘인 28세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당시 저는 교회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는데, 누나하고 여동생이 청년회 감사예배 때 한번 와 보라고 해서 온 것이 연세중앙교회 안수집사가 되기까지 변함없이 신앙생활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예배에 참석한 저는 눈물 콧물 다 쏟았습니다. 예배시간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을 만큼 은혜를 받아 그날로 즐기던 술, 담배를 모두 끊고 그날 저녁부터 철야예배와 새벽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연희동 시절에는 매일 밤 11시에 철야예배가 있었는데, 저도 은혜 받은 후부터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매일 철야예배에 참석하고 새벽예배까지 기도하고는 새벽예배를 드린 후 미아리 집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 단잠을 청하고 다시 출근하곤 했습니다.

당시 연희동은 부자 동네여서 가난하기 그지없는 성도들은 감히 집을 성전 근처로 이사할 수도 없었어요. 교통편도 수월치 않아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걸어와야 했고요. 예배나 기도를 하고 있을 때 비가 오면 물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그 비를 모두 쓰레받기로 담아 양동이에 부어서 밖으로 나르는 일도 했고, 철야예배 말씀이 끝나고 기도할 때에는 의자를 모두 들어서 뒤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 겨우 공간을 마련해 개인 방석을 깔고는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성전에서는 비가 오나 안 오나 곰팡이 냄새가 진동을 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는 예배와 기도로 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분주하다 보니 늘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이 유지되었던 복된 시기였습니다.

/연합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3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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