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별 기독교 현황과 분포] 토착 종교와 부딪쳤으나 서서히 복음의 결실 나타나

등록날짜 [ 2013-06-18 09:51:21 ]

연재를 시작하며
사실 기독교는 서양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기원은 팔레스타인이며, 기독교의 미래는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다. 기독교는 중세와 근대 초기에 서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서구문화를 형성하는 데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존 서양 교회는 전통적으로 서양이 신앙의 진원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 중심의 기독교가 이제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역사적 뿌리가 서양이 아니듯이 기독교는 서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개할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발전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의 수적인 중심추가 기존 서양 교회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운동이 이렇게 거대하게 진행된 적도 없었고, 이렇게 다양하게 진행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웠던 적도 없었다. 현대 기독교는 복합적인 문화 요소에 의해,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긴 그림자에 의해, 신학 문제의 확산에 의해 그리고 지역적 관심사에 의해 형성된다. 현대 기독교 형성 과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세계 지역과 교단을 중심으로 복합적인 기독교 운동을 포괄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전통적으로, 세계 기독교를 탐구할 때 서유럽과 북미를 먼저 파악한다. 유럽과 미국의 저자들이 이곳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


<사진설명> 남아프리카 부족과 협상하고 있는 선교사 존 캠벨(1812년).

아프리카
19세기가 끝날 무렵, 아프리카 그리스도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기독교인은 대개 식민지 종교로, 유럽 열강이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접붙인 종교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유럽인 외에 아프리카 토착민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기독교 지도자들도 유럽에서 건너온 유럽인이었다. 예를 들면, 영국 국교회의 식민지 주교들은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지역이 되었고 기독교가 점점 더 토착화하면서 유럽인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북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 역사의 시작 때부터 첫 몇 세기에 걸쳐 기독교가 확립되었다. 북아프리카는 초대교회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지금의 알제리와 튀니지, 리비아의 많은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 특히 이집트에서 기독교가 왕성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사상과 삶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기독교 가운데 대다수가 7세기에 일어난 아랍의 침략 물결에 쓸려갔다. 그 와중에 기독교는 이집트에서 소수 신앙이 되었지만 살아남았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만이 기독교 국가의 명맥을 유지했다. 16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아프리카 북쪽은 이슬람의, 남쪽은 토착 종교의 지배를 받았다. 고립된 에티오피아를 제외하면, 아프리카에서 이렇다 할 기독교 세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상황이 점차 변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이다. 포르투갈 이주민이 카보베르데 제도처럼 서아프리카 해안의 여러 무인도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착은 아프리카 본토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기독교가 남아프리카에 들어온 것은 18세기부터다. 이는 이 시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의 주요 선교단체들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아프리카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자신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했다. 이슬람이 아프리카 많은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아프리카 영혼에 훨씬 더 잘 맞게 조율된 것 같았다. 게다가 아프리카의 지하자원을 탐내고 흑인을 노예화하려는 서구 열강 세력은 선교를 더욱 어렵게 했다. 어떻게 이런 지역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있을까? 늦게는 1897년에, 영국 종교계 주요 인물들은 기독교가 아프리카에서 뿌리내리는 데 거의 실패했다고 믿었다. 아프리카에 얕게나마 뿌리내린 기독교가 침식당하거나 뽑힐 것 같았다.

19세기 아프리카 그리스도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국외로 추방된 유럽인과 아프리카 토착민이다. 국외로 추방된 유럽인은 고국에서 하던 신앙생활을 가능한 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대개 감성적이거나 자국 문화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영국 국교회가 남아프리카를 비롯한 많은 영국 식민지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회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노예, 여성, 가난한 자였다. 아프리카 기독교가 극적으로 성장한 것은 주로 토착화한 아프리카 기독교 공동체들이 뿌리내린 결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즉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을 발판으로 아프리카에서 자발적으로 교회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 공동체는 늘어나는 회심자에게 전도사와 목사를 보냈고, 회심자는 유럽 선교사보다는 아프리카인 지도자에게 더 끌렸다.

기독교가 성장하자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회에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서구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를 강하게 주장했다. 아프리카 문화는 일부다처제 를 오랫동안 인정해 왔다. 한 남자가 한 아내만 취해야 한다는 유럽 기독교의 주장은 서양의 산물로 여겨졌고,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4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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