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서(8)] 전쟁 시절 전 교인이 순교한 교회

등록날짜 [ 2013-10-01 10:13:14 ]

6.25전쟁 당시 공산당은 산에 숨어서 보복을 일삼으며
특히 기독교인을 향한 적개심으로 교인 전체를 몰살해

<사진설명> 순교자 기념탑.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에 교회가 세워진 날짜는 1908년 4월 5일이다. 당시 미국 남 장로교 배유지(유진 벨, Eugene Bell) 선교사는 목포에 배를 대고 평화롭고 조용한 야월리 마을을 둘러보던 중, 갯마을 사람들이 보인 호의에 끌려 복음을 전해 야월교회를 세웠다.

공산당에게 보복당한 순교자들
평화롭던 야월리에 밀어닥친 불행의 소용돌이는 1950년 6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은 6.25전쟁 발발 3일 전이었다. 북한 인민군 1개 부대가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서해를 통해 야음을 틈타 평화로운 야월리에 기어 들어왔다. 이를 목격한 마을 주민이 염산면 지서에 신고했다.

마침 여순사건을 진압하려고 광주에 주둔하던 국군 병력이 내려와서 치열한 교전 끝에 북한군을 거의 전멸했으나 부상한 일부가 옥실리와 야월리 뒷산으로 도망쳤다. 그 후 야월교회 정일성 집사의 동생 정문성 씨가 나무하러 갔다가 부상해 숨어 있던 인민군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즉시 경찰이 출동하여 포위하였지만, 정문성 씨가 가까이 접근하여 권유하고 설득해서 그 인민군을 자수하게 했다. 그런데 경찰이 그 인민군을 끌고 가 총살해버렸다. 이 사건 이후, 인민군 잔당은 동료 총살 사실에 분노했고, 특히 이 일이 야월교회 교인 때문이라고 생각해 기독교인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

한편 6.25전쟁 발발 후 공산 세력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듯했으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전세가 뒤바뀌어 9월 28일 서울이 수복했고, 마침내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1950년 9월 29일 국군과 유엔군이 목포에서 함평과 영광으로 진입해 들어오자 태극기를 든 주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벌였다.

하지만 미처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은 밤이면 산에서 몰려 내려와 국군 환영대회에 나가서 만세를 부른 교인과 동네 사람을 잡아다 몽둥이로 매질하며 보복사살을 일삼았는데 이런 일이 여러 날 계속됐다. 그러던 중, 교회당 뜰에서 양조장 주인과 다른 유지들을 잡아다가 무릎을 꿇리고, 이들을 공개 처형하려고 마을 사람 앞에서 인민재판을 벌였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악질 반동입니다. 이 악질들을 어떻게 죽이면 좋겠소?” 하고 외치면 한편에서는 “이들은 인민의 원수니 쳐 죽여야 합니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이때 야월교회 김성종 영수(장로교에서 조직이 아직 잡히지 않은 교회를 인도하는 직분)가 나서서 “아닙니다! 그 양조장 집 어른은 흉년이 들어 주민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쌀을 풀어 나눠 주었고,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선 이런 분에게 상을 주어도 모자랄진대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때 “옳소!” 하며 동조하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졌다.

그러자 공산당은 인민재판이 자기들의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자 기독교인을 먼저 죽여야 한다고 음모를 꾸몄다.

그렇게 1950년 9월과 10월 사이 야월리에서는 많은 사람이 공산군에 희생됐다. 그중에서도 야월교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공산당은 교인들을 야월교회당에 모아 놓고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등 온갖 포악한 짓을 다했다.
 
그러나 김성종 영수, 조양현 영수, 최판원, 최판섭 등은 눈앞에 다가오는 끔찍한 죽음 앞에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주여! 주여!” 찬송을 불렀고, 골고다로 향하던 주님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믿음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잔악한 공산당은 성도를 두들겨 패며 바닷물에 빠뜨려 죽였다. 짐승만도 못한 공산당은 갓난아이들까지 손발을 뒤로 묶은 채 바다에 빠뜨렸다. 이렇게 야월교회는 어린이를 포함한 65명 전 교인이 모두 죽임을 당해 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순교자 기념탑 건립
이 같은 눈물겨운 순교 사실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차에, 야월교회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자란 후세대에 의해 다시 시작됐다. 지금은 배길량 목사가 나서서 이들의 순교 사실을 알리고 1989년에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순교자기념비를 세웠다. 이렇게 야월교회 순교 이야기가 전해지자 전국교회에서 모금 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광주노회에서 공산군에 희생한 야월교회 전 교인 65명 순교자의 신앙과 정신을 기리는 순교자기념탑 건립을 마치고 1990년 11월 29일 준공예배와 제막식을 거행했다.


<사진설명> 야월교회 순교기념관.

한편, 전라남도 특별예산과 영광군 특별지원으로 2006년 6월 야월교회 예배당과 순교자기념탑 옆 대지에 연건평 250평 규모로 ‘기독교인순교기념관’을 건립했다. 이 기념관은 야월교회 순교자뿐 아니라 영광군 내에서 순교한 이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1층에는 기독교인 순교 사실을 정리한 전시실이 있고, 1층 중앙에서 2층 높이로 치솟게 세운 거대한 기도의 손 조각 작품은 웅장하고도 수려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2층에는 예배실이 있고, 그 옆에는 순교자들의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그림과 사진을 보여 주는 전시실이 있다. 이곳을 둘러보는 순례자들은 6.25전쟁 당시 신앙 선배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한국교회에 부흥성장을 가져옴은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우뚝 서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된 점을 생각하며 진한 감동을 느낀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5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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