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0-10 13:15:06 ]
日, 예배당 안에 성도를 가두고 불로 태워 무참히 죽여
1982년에 이르러 유해를 수습하고 순교자회관 건립해
<사진설명> 1908년 당시 제암교회당.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 여파가 화성 일대에 불어닥쳤다. 3월 31일과 4월 5일 화성군 향남면과 장안면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일제는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제암교회 성도를 상대로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획책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평화롭던 농촌 마을 제암리에서 일제는 방화와 총살로 예배당을 비롯해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드는 천인공노할 일을 벌였다.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만행 중에서 손꼽히는 비극적 역사가 제암리에서 발생한 것이다.
마을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어
일본 경찰은 계획한 순서에 따라 제암리 일대를 포위하고 15세 이상인 남자는 교회에 모이라고 했다. 제암리 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이자 일본 경찰들은 돌변하여 교인 21명을 예배당에 가두고 문에 못질한 뒤 짚단을 쌓고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렀다. 그때 타오르는 불길 속에 갇힌 교인 중에는 순교를 각오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신앙을 지킨 이가 있는가 하면, 창밖으로 뛰어내린 사람도 있다. 또 일본 경찰은 불길을 보고 달려온 부녀자 2명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그날 무참히 죽은 사람이 23명이다.
이날 교회에 모이라는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교회를 찾았다가 제암교회에 갇힌 남자 21명과 교회 밖 부녀자 2명, 총 교인 23명은 이렇게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일본 경찰이 벌인 잔혹 무도한 만행에 속수무책으로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더불어 동리 가옥 30여 채도 함께 불타는 비극을 맞았다. 일본 경찰은 사람을 칼로 난도질한 후 시체를 나뭇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웠다. 사람, 가옥, 가축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 밖에까지 퍼졌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그 일대는 우물물을 먹을 수가 없어 식수 곤란을 겪어야 했다.
당시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는 이날 제암리에서 일어난 살육과 방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고 전한다. 겁에 질려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불탄 시신을 내버려 뒀다. 이 학살 사건을 전해 들은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제암리에 찾아와서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당시 현장을 몰래 사진에 담았다. 이후 ‘수원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미국에 보내 매스컴에 호소하자 비로소 그 전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불탄 교회에서 수습한 유골과 시신은 장례 절차 없이 인근 공동묘지에 한꺼번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설명> 순교자 23인을 상징하는 돌 기념비.
순교자 유족회관 건립
그 후 제암교회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남은 자들이 신앙으로 교회를 지켰다. 1938년에 기와집 예배당으로 재건하고, 1970년에 일본 기독교인들이 지난날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성금 1000만 엔을 보내 순교자 23명을 기리는 유족회관을 건립하였다.
정부는 제암리에서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1982년 9월에 생존자인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공동묘지에 묻힌 유해 23구를 발굴했다.
유족회관에 순교자 23명을 상징하는 돌 기념비 23개를 세웠다. 단 순교 정신을 기리며 큰 돌기둥에 구멍을 내놓아 ‘어두운 미래 뒤에 찾아올 밝은 희망을 본다’는 메시지를 표현했다. 기념관 내 시청각교육실에서는 ‘아! 제암리여!’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제1전시관은 제암리에서 진행한 3·1운동과 학살, 제2전시관은 일제 강점기 역사와 전국에서 벌인 만세운동을 전시하고 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가 교육과 의료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근대 민족주의의 배양으로 민족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3·1운동을 주도했을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운동 현장을 보며 당시 한국 기독교인이 품은 애국심과 용기를 확인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민족적 자긍심을 지니고, 기독교인 역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사진설명> 현재 제암교회 모습.
위 글은 교회신문 <35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