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7-23 09:28:16 ]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부흥은 멈추지 않는다
■ 유럽
서유럽은 한때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이 현격히 감소했다. 물론, 서유럽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였다는 인식이 옳은가 라는 문제는 논쟁할 여지가 많다. 그런데도 대중이 기독교를 지지하는 지표인 교회 출석률이 당시 서유럽에서 분명히 감소했다.
기독교가 대중문화, 학문적 논쟁 그리고 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20세기 내내 줄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기독교는 계속 쇠퇴해 왔으나 많은 사람은 20세기에 나타난 이러한 경향이 빅토리아 시대부터 이미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유럽에서 지성인들이 세속화했다면 대중문화가 세속화하는 추세는 시간문제다.
서유럽에서 활동하는 종교사회학자와 미래학자가 많다. 그런 점에서, 현재 서유럽에서 지배적인 사고가 세계 흐름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에라스무스에서 로테르담에 이르기까지 유럽인에게 언제나 매력적인 철학으로 자리했다. 중세 사상가들이 태양계 전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듯이, 유럽의 많은 학자는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른 모든 곳에서 일어날 일의 전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유럽이 이끄는 데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따라 가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비(非) 유럽인들은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서유럽 기독교가 직면한 운명은 기독교가 맞을 미래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 자명하고 보편적인 체계가 절대로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유럽은 1990년대에 가장 보편적인 현상인 ‘탈세속화’를 전혀 겪지 않았다. 따라서 서유럽이 맞은 상황을 세계적인 종교 상황이 맞을 전형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현재 서유럽 상황을 미래에 닥칠 세계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체계로 받아들이는 논리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동유럽 기독교가 접한 대조적인 상황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50~1989년에 동유럽 기독교는 마르크스주의 정권에 심한 탄압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은 소련이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급격히 펼쳐가며 반종교적 성향이 강한 정권들이 들어섰다.
서유럽인이 프랑스 혁명을 생각하여 무신론은 해방자로 보고 교회를 압제자로 보는 경향이 있던 반면에, 동유럽인은 정확히 반대로 생각했다. 교회는 무신론 국가에 압제를 받는 국민을 지지했다. 동유럽 교회는 21세기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동유럽 교회는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인권을 수호하는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도전 속에서도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 한국
한국이 처한 상황은 아시아 지역 기독교가 맞을 미래에 중요하다. 한국이 기독교를 처음 접한 때는 18세기 후반이다. 이때 중국이 주도하여 작은 가톨릭 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체는 19세기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전체 그리스도인 1만 8000명 중에서 무려 8000명이 순교했다.
1882년 미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하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얼마 후,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건너와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를 시작했다. 그런데도 20세기가 동틀 무렵, 한국 내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에서 1%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정부가 최근에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00년 남한 인구 5000만 명에서 20%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리스도인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예상하듯 기독교가 부흥한 원인을 분석하기란 복잡하다. 20세기 한국인은 기독교를 적이 아니라 동지로 인식했다. 한국은 1910년에 일본에 통치권을 빼앗겼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특이하게도, 기독교는 한국 민족주의와 일본 압제 하에서 강력하게 결합했다. 아시아에 있는 다른 지역에서는 기독교 비판자들이 기독교를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적은 서양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이 기간 내내, 한국 그리스도인은 하나같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11년 일본을 적대해 반란 혐의로 재판받은 123명 중 98명이 그리스도인이었다. 당시, 한국 내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에서 1%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비율이 갖는 의미는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국은 공산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진영으로 양분됐고, 마침내 6.25전쟁이 일어났다. 기독교 선교 단체가 행한 적극적인 구호활동은 전쟁이 끝난 후 기독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한국 기독교는 1960년대 한국교회가 펼친 사회활동 프로그램으로 한층 더 발전했다. 성장은 거침없이 지속했다. 특히 개신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57년 한국 개신교인은 80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이 수치는 1968년에 187만 3000명으로 배 이상 늘었다. 1978년에는 529만 4000명으로 더 높이 치솟았다.
현재 한국은 아시아 전역에 선교사를 파송한다. 시드니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멜버른에서 뉴욕까지, 서구 주요 도시에 퍼진 대규모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교회 네트워크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렇듯 교회는 공동체 활동, 상호 부조, 영적 양육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한편 북한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갖가지 붕괴 조짐을 보임에 따라, 강경한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도 종교적으로 발전할 기회가 활짝 열려 있다. 기독교가 이미 북한에 깊이 침투했으며 십 년 후면 성장하리라 예상한다.
기독교는 서방에서 쇠퇴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세계에서 벌어질 이야기가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오히려 서유럽과 한국에 닥친 대조적인 시나리오 중 어느 방향이 기독교 미래를 결정할지 묻게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34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