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1-19 10:20:42 ]
주 씨 가문이 세우고 순교자를 키운 교회로 유명
당시 출석부와 순교기념관, 기념비 등 볼 수 있어
우리가 흔히 주기철 목사를 생각하면 평양 산정현교회만 생각하고, 그의 고향을 북쪽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산이며, 부산.경남 지역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신학교에 들어가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목회한 곳이 바로 평양 산정현교회다.
현재 경남 웅천교회(왼쬭). 주기철 목사가 출석할 당시 출석부(오른쪽).
처음 주기철 목사가 신앙을 싹 틔운 곳은 부산 웅천교회다. 경남 창원군 웅천(진해)에서 태어난 주기철(1897~1944) 목사는 일찍부터 고향의 민족주의 학교인 개통학교에서 애국 애족의 눈을 떴다. 이후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과 유영모에게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민족과 역사를 배우며 신앙과 나라 사랑을 동시에 마음에 새겼다. 주기철 목사는 어릴 적 이름이 ‘기복’인데, 오산학교 시절에 ‘기독교 교리를 철저히 따른다’는 의미인 ‘기철(基徹)’로 개명했다.
주기철 목사의 큰형 주기원이 1907년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이듬해 1월 7일에 학습을 받고 10월 5일에 입교하여 온 식구들이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웅천교회에 있는 당시 생명부 기록을 보면 주기복(주기철 목사 아명)은 1910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형님의 권면으로 행사를 즈음하여 교회에 출석했다.
주기복은 개통학교 5학년인 13세에 웅천교회에 나갔으며, 주 씨 가문 20여 명이 출석부에 기록된 점으로 볼 때 일족이 대거 웅천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 그의 맏형인 주기원은 이곳 웅천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어린 기철은 이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주기철은 웅천교회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심, 신앙심을 키우며 큰 꿈을 품었다.
1916년 오산학교 졸업 후 연희전문에 진학했으나 안질에 걸려 1년 만에 낙향, 1919년 웅천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았다. 이 기간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주기철은 목회자로서 소명을 느끼고 1922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후 부산 초량교회(1926~1931), 마산 문창교회(1931~1936),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를 맡아서 목회하였다.
1932년 경남노회장에 뽑힌 주 목사는 1935년 금강산 장로교총회 주최 목사수련회에서 “예언자라면 대중과 시대에 아부하지 말아야 한다”며 일제를 비판하다가 현장에 있던 경관들에 의해 설교가 저지됐다. 이후 주 목사는 일제의 주요 감시 인물이 되었다.
또 1935년 12월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각오를 담은 ‘일사각오(一死覺悟)’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통해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죽는 길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사는 길”이라는 진리를 알렸다. 또 주 목사는 이러한 삶을 실천에 옮겨 4번에 걸쳐 5년 7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처음 구속되던 해인 1938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큰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학생들이 평양신학교 뜰에 있던 일경 출신 평북노회장 김일선 목사의 졸업기념 식수를 도끼로 찍은 일이 발생했다. 일이 커지자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의 상징적인 인물로 주기철 목사를 잡아 가두고 극심한 고문과 태형을 가했다. 이렇게 해서 주 목사가 처음 구속됐다. 이때 주기철 목사는 모진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
일각에서 “신사참배는 국가의례일 뿐 종교행위가 아니다”라며 교회의 입장을 해명할 때도, 주기철 목사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행위라고 강력히 반대하다 연이어 구속되었다. 또 주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에는 폐쇄 명령이 떨어졌다.
이후 1939년 2월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되자마자 주기철 목사는 ‘5종목의 나의 기도’(①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달라 ②오래 계속되는 고난을 견디게 해 달라 ③노모와 처자를 맡아 달라 ④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해달라 ⑤내 영혼을 주님께 맡긴다)라는 유언과도 같은 최후 설교를 하였다. 그는 1940년 9월 투옥된 후 1944년 4월 21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주기철 목사의 유해는 평양 돌박산기독교인묘지에 안장됐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주 목사에게 건국공로 국민장을 추서하였고, 1986년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했다.
주기철 목사의 모교회인 진해 웅천교회에는 순교기념관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부산 초량교회에는 주 목사가 사용한 강대상이 유품으로 보존되어 있다.
일제가 천황을 신성시하고자 획책한 신사참배를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하여 반대하고 거듭되는 투옥에 이어 순교하기까지 고난의 길을 선택한 주기철 목사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순교 신앙은 이 땅에 꺼지지 않는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리라.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