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역사 현장을 찾아서(17)] 신사참배 반대로 최초 순교자가 된 강종근 목사

등록날짜 [ 2013-12-10 09:49:22 ]

1930년대 당시 연건평 1200평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돌덩이만 남아, 감리교 총회 결의로 복원 계획 수립


<사진설명> 철원제일교회 현재 모습. 터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철원제일교회는 1905년 웰번 선교사가 설립한 장로교회였으나 1907년 선교지역을 나눌 때 감리교회가 되었다. 당시 철원제일교회는 선교와 교육, 사회봉사에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한때 강원도 북부에서 성장을 거듭하던 철원제일교회는 현재 그 웅장하고 자랑스럽던 옛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돌덩어리만 뒹굴며 옛날을 회상케 한다. 2006년에 비로소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결의로 옛 모습을 보존하려고 복원건축 계획을 수립했다. 철원 지방 역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근대문화유산 제23호로 지정했다.

당시 웅장하던 석조 건물
철원 지역은 철원제일교회 담임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1919년 3월 10일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또 철원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철원애국단’을 조직해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 문서를 반포하는 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하였다. 이로 보건대 1920년대 철원 지역에서는 기독교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애국애족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철원제일교회는 더욱 부흥 성장하여 1933년도에는 새신자가 50명이나 늘었고, 주일학교 학생이 300여 명 모였으며 한때 교인 수가 500여 명에 달했다. 철원 지역 내 대표적인 교회였으면서도 교회 건물이 작아 예배당 세우는 일을 서둘렀다. 마침내 1920년에 붉은 벽돌로 세운 건물을 헐고 현무암과 화강암으로 서양식 건물로 신축하였으며 건축설계와 시공은 일본 오사카예술대학에서 활동하며 이화여대 본관 건물을 건축한 미국인 건축가 보리스(W. M. Voris)가 맡았다.

연건평 1200평 규모로 웅장한 석조 건물(지하 1층, 지상 3층)로 지은 예배당은 착공 1년여 만인 1937년 9월 30일에 드디어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층에는 소예배실과 성경공부방 열 개가 있고 2층은 대예배실로 사용했다. 당시 한강 이북, 영서 북부지방에서 건축미를 자랑하는 교회로 손꼽혔다.

순교자 강종근 목사
1939년 강종근 목사가 철원제일교회를 섬겼다. 강 목사는 주일 설교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해 냈듯이 한국도 일본의 속박에서 구해낼 모세와 같은 청년이 필요하다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설교를 자주 하였다. 강 목사는 설교에서 일본이 벌인 침략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민족정신의 혼을 교인과 지역주민에게 불러일으키며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는 독립투사로 살았다.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단정하고 단호히 거부했다. 강 목사가 신사참배를 노골적으로 거부하자 일본 조선총독부는 ‘사상범 예비검속령’으로 강 목사를 잡아다가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고문과 회유로 획책했으나 실패하자 구속했다.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죄로 1년형을 선고받아 1941년 7월 3일 철원경찰서에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일본 형사는 강종근 목사에게 용수(죄수 얼굴을 가리는 대나무로 만든 갓)를 씌우고 두 손을 노끈으로 묶어 철원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에 철원역으로 끌고 나갔다. 당시 험악한 상황으로 볼 때 철원역 구내에서 교회 임원과 교인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눈물로 강종근 목사를 전송한 사건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사모 윤희성 여사와 교인들은 눈물 어린 찬송가를 부르며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는 강종근 목사를 배웅하였다.


<사진설명> 1930년대 당시 철원제일교회 모습과 성도들(왼쪽). 강종근 목사(오른쪽).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강종근 목사는 형무소 안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고 정신 차려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그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 주장하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경배할 대상이라고 하였다. 일본 형사들은 가혹한 신문을 계속하며 심한 고문과 모진 체형을 가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높으냐? 일본 천황이 높으냐? 네가 설교에서 말한 모세는 누구냐? 애국자냐, 아니냐? 너도 민족성을 갖고 있느냐?”

강종근 목사가 고문을 견디지 못해 기절하면 추운 겨울에 찬물을 끼얹어 다시 깨어나게 하여 몽둥이로 때리고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렇게 극심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1942년 6월 1일. 철원경찰서에서 윤희성 사모에게 당장 서대문형무소로 가보라는 연락이 왔다. 밤 10시경 서울에 도착하여 서대문형무소 감방에 들어가니 강종근 목사는 홑이불에 덮여 있었다. 손을 만져 보니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지만 아직 숨을 거두지는 않은 듯해서 병원에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일본 경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윤희성 사모가 “목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처럼 죽게 때렸느냐”고 소리를 지르자, 강종근 목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표시를 했다고 한다.

다음 날 오후, 두 사람이 강종근 목사를 들것에 떠메고 윤희성 사모가 머물던 집 대문에 강 목사를 내던지듯 버리고 갔다. 황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했다. 결국 강 목사는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희미한 음성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이었다. 강 목사는 한창 젊음을 불태워 목회할 나이인 38세를 일기로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6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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