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1-27 09:25:55 ]
토머스 선교사 순교지,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교회
115년 역사와 함께 군부대교회와 협력하여 복음화에 앞장
한국 기독교 역사는 19세기에 바깥 세계로부터 밀려든 선교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한다. 그 물결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 서해 백령도가 속한 대청군도다. 대청군도와 인근 해역은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해상에서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현재 중화동교회와 백령기독교역사관(왼쪽). 박물관 내부 모습(오른쪽).
한학 서당에 교회 설립
1816년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이 이끌던 선단에 클리포드(H.J. Clifford) 해군 대위가 자비로 승선했다. 클리포드는 지역 언어를 수집하고 선교 가능성을 탐사하려고 백령도에 정박하여 주민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그 후 1832년 카를 귀츨라프(Karl F.A. Gutzlaff)가 영국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동인도 회사 무역선에 통역 겸 선상 의사로 승선하여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들여놓았다. 귀츨라프는 클리포드의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백령도에 정박해 있는 동안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여러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 백령도에 임시 정박하여 선교 활동을 펼치며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고 기다리는 역할을 했다.
이 중 토머스 선교사는 상인 김자평의 안내로 1865 년 중국에서부터 서북해안, 백령도를 비롯하여 황해도와 평안도를 돌며 두 달간이나 언어를 익히고 숨어서 선교지를 답사하기도 했다. 이어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진입하다가 대동강에서 좌초해 박춘권의 칼에 순교를 당했다.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왔던 개신교회 목사로는 최초의 순교였다.
한편 백령도에 본격적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린 시기는 1891년경 정3품 백령도 진 첨사 자문역으로 참사 벼슬을 지낸 허득에 의해서다. 허득은 진보적 성향을 띤 개화파 정치인으로,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는 관군으로 동학란 평정에 참여했는데, 그때 황해도 장연군에서 소래교회로 난을 피해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런데 소래교회로 난을 피해 오는 이들에게는 일본군이나 동학군, 관군 등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정황을 알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백령도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마침내 1898년 6월 허득은 백령도에 유배 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같은 이들과 뜻을 같이하여 한학 서당에 중화동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때 허득과 김성진은 중화동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마을에 교회를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또 허득은 장연군에 있는 소래교회로 달려가서 서경조 장로를 만나 백령도에 교회가 설립된 배경을 얘기한 뒤 소래교회 건축을 하고 남은 재목을 중화동교회 건축자재로 도와주기를 청원하였다.
마침내 1898년 10월 9일 중화동 한학 서당에서 많은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서경조 장로의 집전으로 설립예배를 드렸다. 백령도에서는 이 중화동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급속하게 발전하여 개화의 꽃도 활짝 피웠다. 날마다 활기를 찾아가던 교회는 마침내 1899년 초가 6칸(12평) 규모로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했다.
백령기독교역사관 건립
경기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에 기독교역사관이 2001년 11월 20일 설립됐다. 백령도에 기독교역사관이 생겼다면 다소 뜻밖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령도는 이 땅에 복음이 전해 내려온 최초의 ‘선택’받은 땅 중 한 곳. 한국 기독교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즉 백령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라 19세기 한국 역사의 중요한 무대였으며, 더불어 초기 기독교 선교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 기독교 초기 선교는 백령도를 근거지로 전개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어 통일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형이기도 하다. 백령도에 설립한 기독교역사관은 30평 규모의 현대식 건물로서 사업비로 총 3억 8000만 원이 들었다. 특히 외부 시설보다 초기 중화동교회 모습, 최초 백령도 복음전파 장면, 서양선교사 성경전달 재현, 토머스 선교사 방문 모습, 언더우드 선교사 모습 등 내부 전시물에 비중을 두고 개관하여 ‘선교 현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외에도 중화동교회 설립사, 역대 성직자 사진, 언더우드 목사 기념비 등 기독교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물로 꾸며 학습 현장으로 더없이 좋은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역문화 발굴 차원과 관광자원 창출 목적으로 옹진군이 발 벗고 나서 추진한 점도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옹진군은 총신대 양지캠퍼스 소래교회, 화성군 제암리교회 같은 곳에 직원을 파견, 현지 조사를 통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토대로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이번 기독교역사관을 개관했다. 이렇듯 백령기독교역사관은 군(郡)과 교회가 조화를 이뤄 설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6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