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서(2)] 시골 한적한 교회에서 흐르는 순교의 정신

등록날짜 [ 2013-08-13 09:14:20 ]

신사참배 강요와 공산당 횡포에도 복음의 열정은 식지 않아
등록문화재로 지정, 우리나라 대표 한옥형 교회로 인정받다


<사진설명> 행곡침례교회.

‘1908 행곡교회’. 문명의 퇴보를 겪던 20세기 초. 한반도 이 외진 곳에 행곡교회를 거쳐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은 그 무렵 동력과 동선을 헤아려 해석하기엔 합리적이지 않다.

울진은 1895년 현에서 군으로 승격했다. 울진면은 1979년에서야 읍으로 승격한 한적한 곳. 행정상으로 1963년까지 강원도 땅이었다.

본래 강원도에 속했던 울진은 1963년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 울진 행곡교회는 강원도 지역의 초기 기독교 선교 역사를 가지고 경상북도로 넘어온 셈이다. 1908년 침례교와 감리교가 울진에 들어왔다. 감리교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해방 이후 다시 들어왔다.

대한기독교침례회사에 따르면 행곡교회는 1905년 공주 성서신학원을 졸업한 손필환 문서선교사가 포교해 울진지역 첫 교회가 됐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말콤 펜윅에게 전도받아 예수를 영접한 손 선교사가 왜 멀리 울진까지 와서 포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손 선교사는 1907년 겨울 충남 공주교회에서 개최한 침례교 총회 격인 대화회(大和會)에 울진 출신인 전치규, 전치주, 남규연, 남규백 등 성도 8명과 함께 참석한 기록으로 보아 펜윅처럼 선교하려고 울진 오지까지 일부러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2년이 지난 오늘, 행곡교회는 여전히 마을에 남아 복음을 전한다.

순교의 피가 흐르는 교회
행곡교회는 침례교단 소속이다. 침례교는 강경과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한 엘라싱선교회와 원산에서 활동한 펜윅 선교사를 뿌리로 한다. 엘라싱선교회가 철수한 뒤에는 펜윅이 선교를 전담했다. 1906년 펜윅이 강경에서 창설한 ‘대한기독교회’가 침례교단으로 발전했다.

1908년 2월 공주에서 침례교 총회에 해당하는 제2회 대화회(大和會)가 있었는데, 울진 출신인 전치주, 남규연, 남규백 등이 참석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펜윅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울진에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해 11월 손필환 선교사가 울진을 방문해 남규백 소유인 초당집을 빌려 울진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행곡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와 함께 고난을 겪었다. 행곡교회뿐만 아니라 침례교단 전체가 감당해야 하는 가시밭길이었다. 1930년대 일본은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침례교와 성결교가 가장 크게 반발했다. 핍박과 죽음의 길로 뛰어든 셈이다.

행곡교회 교인들이 감내한 희생도 컸다. 당시 침례교 감목(총회장)이던 전치규 목사는 1941년 헌병대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1944년 함흥 교도소에서 옥살이하다 영양 부족과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순교의 피는 해방 후에도 흘렀다. 신사참배 거부로 행곡교회는 폐쇄되었고 담임하던 전병무 목사는 감옥에서 신앙을 지켰다. 해방 후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1949년 공비들에게 잡혀 남석천 성도의 집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남석천도 그날 죽임당했다. 한국 침례교 역사상 예수를 위해 죽은 이는 스물한 명이다. 그중 셋이 행곡교회 출신이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
행곡교회는 근남면 행촌리에 있다. 교회가 세워지고 얼마 동안은 남규백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 1910년 작은 초가 한 채를 짓고 예배를 드렸다. 1934년에는 남규백이 기증한 땅에 예배당을 옮겨 지었다. 울진 읍성 병영 건물을 해체할 때 나온 자재들을 가져다 지었다.


<사진설명> 옛 예배당(왼쪽)과 용장교회(오른쪽).

옛 예배당을 중심으로 동쪽엔 목회자 사택이 있고, 왼쪽에는 1983년 건축한 현재 예배당이 있다. 하나씩 지었지만, 결과적으로 세 건물이 ㄷ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교회 북쪽으로 울창한 숲이 감싸고, 남서쪽으로 개천이 흐른다. 나머지는 온통 논이다. 논이 바다처럼 교회를 둘러싸 교회는 자연히 섬이 된다.

옛 예배당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짜리 한옥으로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막돌로 쌓은 단층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우고 팔작지붕에 전통 기와를 얹었다는데, 1995년부터 금속 기와로 바꿔 올렸다. 출입구는 좌우로 열고 닫는 두 짝 미닫이 문이다. 벽 좌우에는 격자형 두 짝 미닫이 창이 나 있다. 정면 오른편에 있는 외여닫이문은 목회자 출입용인 듯하다.

내부는 통간으로 동쪽에 강단이 있다. 마룻바닥 한쪽 구석 마룻장을 들어내면 반 평 넓이, 2미터 깊이 지하 방공호가 있다. 아마도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피난처로 사용하려고 만든 것 같다. 천장은 원래 연등천장이었는데, 1973년 대들보 위를 합판으로 마감했다.

옛 예배당은 1934∼1983년 본당으로 쓰인 ㅁ자형 한옥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에 홑처마 구조에 51㎡ 넓이다. 이 건물은 건립 당시 남녀유별사상에 따라 남녀예배석을 구별했으나 이후 구별 해제로 위치가 변경됐다.

이런 점 때문에 한국교회건축사에 남는 귀한 사료로 인정돼 2006년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건립 당시 해체한 울진 읍성의 병영 건물을 매입하여 대들보 등을 삼아서 이 지역 한옥 건축 흔적도 보존한 셈이다. 행곡교회에서 세운 죽변면 용장교회도 등록문화재로, 그 무렵 한옥형 교회를 대표한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4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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