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서(6)] 3.1운동 후 교회와 마을 전체가 큰 수난 겪어

등록날짜 [ 2013-09-11 09:13:50 ]

교인과 주민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한 비극의 현장
1987년에 원래 옛 형태인 초가집으로 복원 중건


<사진설명> 수촌교회 복원 모습.

수촌교회는 1905년 김응태 목사(당시 성도)의 주도로 정창하의 집에서 7명이 모여 예배드림으로 시작되었다. 1907년 수촌리 큰말 소재 초가 15칸을 사서 예배당으로 수리,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김교철 전도사와 수촌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일반 주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 때문에 4월 15일 새벽 일본군이 침입하여 예배당을 위시한 40여 호 온 마을에 방화하고 예배당도 큰 수난을 겪기에 이르렀다.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과 방화사건은 차마 입을 열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는 제암리교회 방화 사건보다 먼저 일어났으며, 화성 일대에서 벌어진 참극의 서막이었다. 이 사건은 본래 수촌리가 속한 장안면과 우정면 지역 주민들이 벌인 독립만세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수촌리와 인근 석포리 사람들은 4월 초, 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소 주재소 순경들이 양민들을 학대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데 대해 항거하려고 면사무소와 주재소로 몰려갔다.

갑자기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항거하려고 달려드는 주민들을 향해 일본경찰이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대다가 마침내 실탄이 떨어졌다. 그때 총알이 빗발치자 이를 피해서 도망치던 군중이 때는 이때라고 만세 소리를 높였고, 다시 일본경찰이 총알이 떨어져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자 그들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와바다 순사부장과 필사적인 격투를 벌이던 중 흥분한 군중이 가와바다를 잡아 내동댕이치며 발로 짓밟았다. 총을 쏘아대다가 총알이 떨어져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한 군중은 사정없이 짓눌러 마침내 실신하자 그를 버리고 황급히 도망쳐 버렸다. 그는 결국 목숨을 잃었고 이로 말미암아 수촌리 일대에 가혹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사진설명> 수촌교회 교우들의 가장 오래된 기념사진으로, 1938년 1월 11일 수원지방 대 사경회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 한복 입은 분이 이익모 목사(제암교회), 앞줄 오른쪽 첫째가 김태권 장로, 앞줄 왼쪽 둘째가 김재학 씨, 뒷줄 오른쪽에서 셋째가 김재임 장로 부친 김연묵 권사.

일본 순경들은 가와바다 일본 순사부장의 죽음을 보고 독이 오를 대로 올라서 범인을 색출하려고 나섰다. 독이 오른 일본 순사들이 무기를 들고 수촌리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일경들은 수촌리를 시위대 진원으로 지목하고 계속해서 4차례에 걸쳐 가장 혹독하게 보복을 가하였다.

1차 보복은 4월 5일 새벽 3시 반경 수비대 30여 명을 이끌고 수촌리 큰말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격을 가하며 수촌리 교회당과 가옥 24채에 불을 질러서 주민 5명이 부상했다.

2차 보복은 이날 오후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가 수촌리에 들러 남은 가옥 8채를 샅샅이 수색하던 중, 가와바다 순사부장이 짓밟혀 죽을 때 입었던 그 피 묻은 옷을 찾아내었다. 그 당시 주민들을 발안리 주재소로 끌고 가서 혹독하게 고문을 가했다.

4월 7일 일본 수비대는 3차 보복으로 수촌리 가장말을 비롯하여 꽃말, 용담골을 집집이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협박하여 발안리 주재소로 끌고가 밧줄에 묶어 몽둥이질을 하였다. 이날 끌려온 주민들은 무려 130여 명에 달하였다.

4월 8일 전개된 4차 보복에서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자, 나머지 가옥 4채에 다시 불을 질렀다. 이 방화로 수촌리는 전체 40여 가옥 중 36채가 불타는 참사를 겪게 됐다.

수촌교회가 바로 이 난리통에 불에 타 버렸는데, 신앙이 돈독하던 김의태 성도는 자기 집이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는데도 황급히 우선 자기 교회로 달려갔다. 불 속에서 교회의 중요문서인 교적부(생명록)와 당회록 등이 들어 있는 50㎏ 이상 되는 무거운 궤짝을, 혼자서 밖으로 들어내었다. 이렇게 화재에서 건져진 수촌교회의 소중한 유물은 한국기독교 역사에도 기념비적인 귀중한 자료가 됐다.

그 후 1922년 4월 선교사 아펜젤러와 노블의 도움으로 초가 예배당 8칸을 마을에 건립하여 사용하다가 1932년 수촌리로 이전하였으며 1987년에 원래 형태인 초가집으로 복원.중건하였다.

수촌교회는 남양교회와 제암교회 인근에 있다. 교회 주변에는 일제의 잔인한 보복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부상자들을 치료해 준 스코필드 박사 기념비와 3.1 독립 운동 기념비 등이 있다.

수촌교회는 제암교회와 같이 3.1운동 당시 일본 경찰에 의해 죄 없는 교인과 주민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한 비극의 현장이다.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된 건물은 본래 초가 예배당 8칸으로 사용해 오다가 1932년 1월 수촌리로 다시 이전하였다.


<사진설명> 현재 수촌교회.

1987년에 초가 형태의 옛 수촌교회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복원된 역사자료관에 화재 속에서 건진 유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한편 그 옆에는 1965년 건립된 현대식 벽돌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서 수촌교회의 역사와 화성 제암리교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수촌교회와 제암교회 등이 자리한 경기도 화성 일대는 일제만행에 맞서던 민족 저항운동의 생생한 현장이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5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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