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0-15 13:19:27 ]
한국인만의 자발적 노력과 결단으로 세워져
암울하던 시대에 미래를 향하여 빛을 발해
봉화 척곡교회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청량산 자락에 있다. 선교 초창기에 세운 교회 대부분을 서양 선교사들이 전도한 결과로 지었다면, 이 교회는 특이하게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노력하고 결단하여 세웠다. 지금까지 100년 역사를 꿋꿋이 견디며 옛 모습을 보존한 봉화 척곡교회는 한마디로 자생교회라 할 수 있다.
척곡교회는 해발 350미터 고지대에 건축했다. 집도 잘 보이지 않는 산길을 차로 10분 이상 달려야 비로소 교회를 만날 수 있다. 다니는 버스가 없고, 위치를 물어도 설명해 주기 곤란한 산속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교육시설 그대로 보존
봉화 척곡교회는 설립 역사뿐 아니라 건축 형태도 독특하다. 대부분 초기 예배당이 한국식으로 ‘ㄱ’자나 ‘一’자 형태로 건축한 양식과 달리, 이 교회는 정사각형을 띤 국내 유일한 ‘ㅁ’자형 교회다. 예배당과 함께 세워진 교육 시설(명동서숙)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봉화 척곡교회를 처음으로 세운 창립자는 대한제국 탁지부(현재 재경부) 관리를 지낸 김종숙(1872~1956년)이다. 김종숙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전한 설교에 감흥을 받고 “일제의 사슬을 끊고 나라가 독립하려면 야소교를 믿어야 한다”는 신념을 품었고,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낙향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종숙은 처가 마을인 봉화 유목동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주일이면 시골 산길 30리를 걸어서 문촌교회에 다녔다. 몇몇 신도와 뜻을 모아 기도처를 만들어 신앙생활 하던 중, 1907년 5월 17일 마침내 척곡교회를 세웠다.
그 후 2년 뒤인 1909년 3월 29일에 아홉 칸짜리 정방형 기와집 예배당과 여섯 칸짜리 초가집 ‘명동서숙’을 건립하였다. 예배당은 원래 마룻바닥에 기와지붕이었지만, 나중에 함석지붕으로 교체하고 긴 의자들을 들여 놓았다. 지금 있는 남쪽 출입문은 처음에 동서쪽으로 각각 문을 따로 내 남녀가 출입하는 길을 구분하였다. 또 예배실 가운데에 광목을 쳐서 남녀석을 구분하여 얼굴을 마주 보지 않게 하고 예배를 드렸다. 교회 살림은 가난한 산골 신자들이 낸 성미 쌀로 유지했다. 지금도 예배당 양쪽 벽엔 성미 자루를 건 못들이 박혀 있다.
예배당 앞에 지은 초가 건물 ‘명동서숙’은 일제강점기에 후진을 양성하고자 지은 교육기관이다. 이곳에서 신교육을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전파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성경, 국어, 산수, 한문을 가르쳤다. 그 당시 이 지역사람 대다수가 이곳에서 공부했고 암울하던 일제강점기 시대에 미래를 향하여 빛을 발하는 교육기관으로서 큰 몫을 감당하였다.
사진설명-척곡교회 종탑(왼쪽). 현재 척곡교회와 복원된 명동서숙(오른쪽).
문화재청 지정 등록
이렇게 어둠을 밝히던 교회는 1918년 무렵에는 한번에 120여 명씩 예배를 드렸다. 김종숙 장로는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봉화 지역 6곳에서 교회 시무를 맡으며 봉화지역 신앙운동과 애국애족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그러던 중 김종숙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결국 김종숙은 독립운동가를 숨겨 주었다는 죄목으로 일경에게 탄압을 받았다. 명동서숙을 폐교하자 일제의 탄압과 핍박을 견디지 못한 신자들이 하나둘 흩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일제 패망과 함께 해방을 맞자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려는 의욕이 일어 예배당을 부분적으로 증축하고 보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워낙 산간벽지이고 신자 대부분이 흩어져 도심으로 이주해 간 탓에 ‘구국입국, 교육입국, 신앙입국’을 실천하려던 옛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김종숙 장로는 장손인 김영성 장로 부부에게 ‘봉화 척곡교회를 잊지 말라’는 뜻을 전했고, 노부부는 그 유지를 받들어 2004년 낙향하여 교회를 지키고 있다. 봉화 척곡교회는 한국선교 초기 교회건축물 연구에 높은 가치를 지닌 국내 유일의 ‘ㅁ자형’ 교회로 2006년 6월 19일에 문화재청 지정 제257호로 등록되었다.
한편 장로교단 제91회 총회역사위원회에서는 이곳을 한국기독교역사 사적 제3호로 지정했다. 교회는 2009년 6월 16일 한국기독교역사 사적 3호로 지정된 점과 명동서숙을 원형대로 복원한 점을 감사하는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때 한국 교회사가(敎會史家)인 김수진 교수를 비롯한 교계 지도자, 지역기관장과 함께 많은 성도가 기쁨으로 참여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깊이 되새겼다.
암울하던 시대, 뜻있는 한 사람이 애국심과 의식 있는 사고를 지니고 교육의 열정으로 명동서숙을 세웠다. 산간벽지였지만 신교육을 제공해 미래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큰 뜻을 펼쳤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동적이다. 김종숙은 정신문화운동, 생명 살리는 운동으로 교회를 세웠다. 또 모진 탄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투철한 신앙관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돕다가 모진 고난을 겪었다. 올곧은 신앙을 잃지 않은 김종숙 장로의 삶은 오늘날 사회에서 신뢰받지 못하는 기독인을 향해 울리는 큰 경종이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5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