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2-24 09:56:45 ]
선교 초기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논밭 제공하며 전도해
주일에는 오직 예배에 집중… 축복의 땅으로 인정받아
<사진설명> 현재 비봉교회 전경.
비봉교회는 의성지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회다. 1900년대 초엽에 미국 선교사들이 이 지역의 선교를 위해 찾아오면 가장 먼저 방문했던 곳이다. 선교사들은 이 교회를 출발점 삼아 이웃마을로 복음을 전파하러 떠났다. 비봉교회는 이처럼 한 때 경상북도 북부지역 교회의 선교 중심이었다.
창립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경북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에 자리잡고 있는 비봉교회는 성도들의 주일성수가 그 세월만큼이나 이어져 지역사회에 독특한 기독문화를 꽃피운 교회다. 구한말 개화기인 1902년 기독신앙을 받아들인 비봉리의 성도 100여 명은 주일성수를 마을의 가장 성스러운 전통으로 여기고지금도 성스럽게 지키고 있다.
비봉교회 성도들의 이런 전통을 다른 마을 불신자들까지 주일을 쉬는 날로 여기고 농사일을 하지 않고 있다.
네 칸 초가 예배당에서 시작
의성지역 선교사들의 선교방법은 좀 특이했다. 선교사들은 마을의 논밭을 사들인 뒤 농민(주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다.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생활의 터전까지 마련해 주는 선교방법을 택한 것이다.
비봉교회는 1894년 김수영 씨가 당시 청도에서 선교하던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1900년에 비봉리에서 가정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다. 그후 1902년 정치복, 박봉순 씨 등 성도들의 주선으로 비봉리 748에 초가 4칸 예배당을 짓고 첫 예배를 드렸다.
비봉교회의 자랑스러운 첫 사업은 1908년 사립기독개신학교를 세워 성경말씀은 물론 신학문 등을 가르쳐 기독신앙인을 많이 배출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30년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됐다. 당시 박봉순, 설봉화 장로와 설인철, 구경모 집사가 이를 반대하다 일경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40평의 예배당 건물은 철거돼 읍내 소학교 건축자재로 사용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성전은 다시 세워졌다,
아쉬운 점은 교회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훔쳐갔는데 그 가운데는 교회의 초창기 당회록을 비롯한 회의록과 중요한 서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서들은 도둑에겐 별로 쓸모없는 것이었기에 불에 태워져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30년대의 서류 몇 점과 개신학교에 대한 자료는 건질 수 있었다.
지역발전에도 큰 역할
비봉교회는 교회의 설립연도에 대해 명확하게 알아내기가 대단히 어려웠다고 한다. 한국교회사를 기록한 여러 문헌자료에는 이 교회의 설립이 1902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교회를 설립한 이들(정채복, 박봉순)과 관련된 후손들의 증언은 이 교회가 1898년에 설립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주장 가운데서 어느 한쪽이 맞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던 까닭에, 이 교회 당회는 그 중간치를 잡아서 1900년을 교회설립연도로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의 설립연도를 정확하게 밝히는 일은 아직도 과제로 남아있는 셈이다.
<사진설명>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교회로 선정(왼쪽). 첫 예배당. 네 칸 초가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오른쪽).
비봉교회의 사료를 수집하던 중에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다. 이 교회의 설립초창기에 예배당으로 사용한 건물을 발견했던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현재 이 건물은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가정집의 아래채다. 건물의 크기는 네 칸이고 현재 지붕은 스레이트로 덮혀 있었다. 건물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했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도 이 건물은 비봉교회는 물론이고 의성지역 최초의 예배당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교회 성도들이 지역 발전을 위해 앞장선 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수두룩하다. 일제강점기부터 교회를 지켜온 설봉화 장로는 비봉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던 중 휴전되던 해 소천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비봉교회는 수많은 목사와 학자를 배출했으며 비봉리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예의범절이 남다른 마을로 소문나 있다. 의성군에서도 비봉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정한지 오래다.
축복받은 땅, 살기 좋은 고장
1972년 초 철근콘크리트로 78평의 넓은 현대식 성전을 갖게 된 비봉교회는 성도들이 지켜온 철저한 주일성수가 점차 세상에 알려지면서 ‘축복받은 교회’라는 찬사와 갖가지 이적을 낳았다.
지질학적으로 비봉리는 지하수가 나지 않는 고장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성도들이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린 후 지하수를 개발하자 엄청난 양의 물이 솟아올랐다. 당시 솟아오른 물은 3개월 동안 계속 퍼 올려도 마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인근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고 있다.
비봉교회는 또 이웃 도동교회(의성읍교회)를 비롯, 11개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잇따라 개척해 의성지역 선교에 불을 지폈다. 비봉리도 비봉교회의 성장과 함께 ‘젖과 꿀이 흐르는 한국의 가나안’으로 바뀌며 살기 좋은 고장이 됐다. 마을 어느 곳을 파더라도 물이 잘 나와 다른 곳보다 농사가 잘되며 어떤 작물을 심어도 병충해나 가뭄이 없고 수확이 많아져 마을살림도 꽤 부유해졌다. 비봉교회 앞마당에는 2000년 3월 선교 100주년을 맞아 대리석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곳에는 100년의 역사를 지켜온 교역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6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