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서(20)] 네덜란드에 조선이라는 나라 알려

등록날짜 [ 2014-01-07 09:49:44 ]

일본으로 가려다 표류해 제주에 안착 이후 13년간 지내
『하멜표류기』 저술하여 선교사 파견에 큰 영향력 끼쳐


<사진설명> 하멜상선전시관.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의 산방산(山房山)기슭에는 하멜 상선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은 핸드리크 하멜이 제주에 표착한 지 350주년을 기념하여 네덜란드 바타비아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재현하여 2003년 8월 16일에 설립하였다.

원래 그가 암스테르담에서 타고 온 스페르웨르 호를 모형으로 제작하려 했으나 고증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부득이하게 그와 비슷한 범선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

전시관 내부에는 선상생활 소품을 비롯하여 각종지도, 『하멜표류기』 번역 서류, 동인도회사와 당시 아시아의 모습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하멜의 조선 표류
헨드리크 하멜(Hendrick Hammel, 1630~1692)은 1630년 호트쿰 시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에 서기로 취직해 스페르웨르 호를 탔다. 이 배는 함포 30문이 장치된 3층 갑판 540톤급 범선이다. 이 배는 1653년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다. 선원 64명 중 36명만이 살아남았다.

하멜의 제주 표착지는 현재 사계리 해안으로 알려져 있지만, 표착지가 사계리 해안이 아니라 고산리 한장동, 신도2리 도원포구 등이라는 주장도 제기돼 학계의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어찌됐든 하멜의 제주 표류는 제주가 바람의 섬임을 확인하게 해 준 한 예일 뿐 아니라 표류기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스페르웨르 호에는 녹피, 명반, 설탕 등 많은 무역상품이 실려 있었다. 난파된 배에서 건진 이 물품들을 조선 정부는 모두 선원에게 돌려주었고 그들은 이것을 팔아 살림에 보태 쓰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26년 전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표착해 귀화한 박연(벨테브레, 1595~?)을 통역으로 보내 자세한 경위를 조사했다. 박연은 조선 여자와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고 무과에 급제해 훈련도감에 근무하며 병자호란에도 참전하고 전쟁 후 병기 개발에 큰 공을 세웠다.

하멜 일행은 일단 제주도에 억류돼 있었는데 표착 10개월 만인 1654년 6월에 탈출하려다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됐다. 서울로 끌려와서는 효종에게 신문을 받았다. 임금은 이들에게 호패를 내려주며 훈련도감의 박연 아래 배속했다. 표류된 외국인을 송환한 예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붙잡아 두고 북벌정책에 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화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사신에게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외교문제로 번질 공산이 커지자 조정에서는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입막음하고 모두 강진으로 유배했다. 이리하여 1656년 3월 이들은 강진 병영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각종 잡역에 동원됐고 한 달에 두 번은 점호를 받으며 주로 병영성과 장터의 풀을 뽑는 일을 했다. 하멜 일행은 병마절도사에게 가혹한 노역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멜은 흉년과 질병이 유행할 때 동네 사람에게 도움 받은 고마운 일들을 잊지 않고 기록했다.

일본으로 탈출
꿈도 없이 억류생활만 계속하던 하멜 일행은 탈출했다. 풍랑을 넘고 넘어 3일 뒤 일본 고도(五島)에 표착했다. 이어 나가사키의 본사로 인계돼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조선에 표착한 지 13년 28일 만이었다.

하멜은 나가사키에 체류한 1년간 지난 13년 동안의 일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멜의 보고서는 곧바로 책으로 출간돼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사진설명> 전시관 내부.

『하멜 보고서』는 기행문학으로도 성공해 유럽에서 발간한 유명한 기행문학 전집 속에 들어갔다. 이 책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외국인이 쓴 가장 충실한 조선견문록이 됐다.

하멜은 귀국해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를 저술해 극동 은둔국(隱遁國)인 조선에 대해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법속(法俗), 종교, 교육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비교적 소상하게 묘사했으며, 이로써 세계에 조선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저술이 후일 네덜란드 선교회가 파송한 귀츨라프 선교사가 한국을 찾아오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은 1980년 4월 한·네덜란드 간 우호증진을 위해 각각 1만 달러씩, 2만 달러 예산을 들여 산방산 바로 앞 용머리 언덕에 높이 4m, 폭 6.6m 크기로 하멜기념비를 세웠다. 하멜은 네덜란드로 돌아간 이후 동인도회사에 복직해 회계사로 근무하며 한 차례 동방을 다녀갔고 1692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그는 독신이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6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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