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서(22)] 전남 동부권 복음의 시초가 되다

등록날짜 [ 2014-01-21 09:15:33 ]

마을 사람들이 직접 복음을 듣고 와 자생으로 세운 교회
현재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세우고 선교공원으로 만들어


<사진설명> 현재 웅동교회. 

광양지역에 기독교가 전해지고 웅동교회가 세워진 일은 뜻밖의 일에서 비롯했다.

조정이 내린 명을 받아 한 관리가 광주에 내려왔다. 관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을 죽이고 웅동 마을로 숨어든 한태원 씨를 잡으라는 명을 받았다.

광주에 내려온 관리는 주민들이 도박만 일삼는 모습을 보고 한탄했다. 관리가 “노름하지 말라”고 하니 사람들은 “시대는 동학으로 어지럽고 농사는 배우지 못해 할 수 없고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대안을 주시오” 하고 요청하였다. 관리는 자기가 믿지는 않지만 광주에 ‘야소교’라는 신앙이 새로 들어왔다고 말해 줬다. 그 신앙을 믿으면 노름하지 않고 좋은 사람이 된다고 덧붙였다. 또 광주에 있는 오웬성 교사와 광주 양림동 책방에서 일하던 조상학 목사(1877∼1950·공산당에 순교함)를 소개해 주었다.

선교사 도움 아닌 자생한 교회
동갑내기(당시 40세)였던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씨는 1904년 광주에 있던 조 목사에게 복음을 받았다. 그후 웅동 마을 농가의 사랑방을 빌려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광양지역 첫 예배당인 웅동교회다.

사랑방 예배는 교인 수가 점차 늘어났고 웅동마을에 살던 열아홉 가구 전부가 예수를 믿는 이적이 일어났다. 1905년 3월, 웅동마을 인근 신황리에 한옥 8칸 목조건물로 신황교회를 지어 이사했다. 이후 웅동교회는 두 차례, 신황교회는 세 차례 증·개축했다.

조상학 목사 가족은 신황리 교회 뒤편 깊은 산자락에 기거하며 광양 일대는 물론 순천, 여수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1949년 4월 1일 덕양교회에 부임했다. 덕양교회에서 1950년 9월 28일에 73세로 고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수갑을 차고 순교하였다.


<사진설명> 왼쪽부터 서병준 장로. 장기용 장로. 

선교사들이 먼저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들어선 다른 지역과 달리 웅동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이 아닌 민간인이 개척했다.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씨가 광주까지 가서 복음을 접하고 1900년경 광양지역 최초로 교회를 설립했다.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서양의 많은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당시 순천, 광양, 구례, 화개, 악양, 하동 같은 영·호남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인 이곳 웅동마을에 선교사의 발길이 닿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선교사들은 ‘권서’라고 불리는 ‘조선인 선교 조직’을 만들어 성경책을 마을 사람에게 보급하며 선교활동을 펼쳤고, 기독교 인구가 이 지역에 빠른 속도로 확산했다.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한태원은 그 후 장로 직분으로 헌신하였다. 특히 박희원은 1939년 전도인 임명을 받고 광양지역은 물론, 순천, 여수, 구례, 벌교, 고흥, 보성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광양지역 교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 외에도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교육하고자 광신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광신학원은 지역 인재를 육성할 요람으로 자리했고, 수많은 목회자와 항일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였다.

마을 전체를 선교공원으로 조성

<사진설명> 광양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

2008년 광양시와 광양선교 100주년기념사업회가 수년간 노력한 결실로 <광양시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이 건립 개관하였다. 웅동지역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을 고려하여 웅동마을에 세워진 <광양시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층마다 한국선교역사, 광양지역 선교역사,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실을 배치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실에는 순교자 214명을 소개했으며, 한국기독교선교의 역사가 지닌 애국정신과 순교정신을 고증했다. 기념관 관장을 맡은 서승기 목사는 웅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자 웅동교회 시무목사로 고향을 지키고 있다. 광양시와 100주년 선교기념관은 웅동마을을 ‘선교공원’으로 개발하여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 전남 동부권의 새로운 관광지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7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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