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1-14 09:26:33 ]
한국인 최초 7인 목사 중 한 명… 한반도 땅끝까지 복음 전해
신사참배 반대로 모진 고문받고 출감 후 우학리교회서 순교
<사진설명> 옛 우학리교회 모습.
1865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기풍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 당시 증조부가 역적으로 몰려 황해도로 피신한 탓에 입신양명은 꿈도 못 꿨다. 또 조선이 외세에 의해 몰락해 가는 암울한 현실에 절망하여 젊은 시절을 싸움과 술로 낭비했다. 이기풍은 서양 오랑캐를 당연히 싫어했다.
<사진설명> 이기풍 목사. 1939년 평양신학교 졸업 당시.
1890년 어느 날, 이기풍은 평양 장터에서 노방전도 하던 마펫 선교사(S. A. Moffett, 마포삼열)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하고, 건축 중인 장대현교회를 때려 부수며 ‘복음의 훼방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후 청일전쟁으로 이기풍 일가는 원산으로 피난했다. 힘겹게 지내던 어느 날, 이기풍은 길을 걷다가 스왈른 선교사(W.L.Swallen)를 보며 문득 예전에 자기가 돌로 친 서양 선교사 생각이 들었다. 양심에 가책을 받으며 괴로워하던 중, 꿈에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 될 사람이니라”라는 음성을 들었고, 그 후 전군보 전도사가 간곡하게 전도해 예수를 영접했다. 독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난 이기풍은 날마다 전도하며 하루를 보낼 정도로 완전히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었다.
제주 선교의 문을 열어
1898~1901년까지는 함경남북도 일대에서 성경을 판매.보급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1901년에는 장로 직분을 받았고 1902년부터 1907년까지는 황해도 지역에서 조사로 활동하며, 1902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6월 20일 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고 그해 9월 17일 조직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이기풍, 서경조, 길선주, 한석진, 방기창, 송인서, 양전백과 함께 한국인 최초 목사 7인 중 한 사람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 겨울 이기풍 목사는 ‘한국장로교 첫 외지선교사’로 임명받고 제주도로 향했는데, 인천을 출발하여 목포에 도착하니 풍랑이 심해서 목포에 가족을 남겨둔 채 제주도 가는 배에 혼자 몸을 실었다. 거센 풍랑과 싸우며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이듬해인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제주도 주민이 기독교를 핍박해 굶주림과 생활고를 겪었다.
어느 날 해안가에 전도를 나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기풍을 한 해녀가 구했는데, 그 해녀에게 복음을 전해 제주 선교의 첫 열매를 맺었다.
이 같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제주도 개신교회사가 비로소 시작됐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에서 약 10년간 사역하다가 사임하고 광주 북문내교회, 순천읍교회, 벌교교회 등지에서 사역하였으며 돌산, 완도를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34년에는 칠순인 노구를 이끌고 누구도 선뜻 가길 꺼리는 땅끝마을 우학리 작은 섬에 들어갔다.
신사참배 반대에 목숨 걸어
이기풍 목사는 부임한 날부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신사참배 하는 날에는 으레 섬 주재소로 불려가 옥에 갇혔다. 또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죄로 쌀 배급을 받지 못해 온 식구가 감자를 먹으며 끼니를 연명했다. 이기풍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는 철저했다. 자녀가 다니는 학교가 신사참배 하기로 정하면, 당장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집으로 오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학교로 보냈다.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으로 반대해서 1938년 체포, 구속되어 고난받다가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당시 72세로 최고령이었던 이기풍 목사는 고령에다가 심한 고문으로 자리에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죽기 직전에 감옥에서 나온 이기풍 목사는 강제로 여수경찰서에서 우학리 섬으로 옮겨졌으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1942년 6월 13일 주일, 부축을 받아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하면서도 신사참배 반대를 강력하게 부르짖었으나 결국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77세로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관
<사진설명> 현재 우학리교회 모습.
이기풍 목사의 선교 초기 중심교회이자 제주 최초교회인 성안교회 뜰에는 1984년 교회창립 76주년을 맞아 교회 성도가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를 세웠다. 또 제주도 <이기풍선교기념관>에는 그와 관련한 제주도 선교자료를 집대성하여 전시했다.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를 향해 돌을 던지던 깡패가 매서인(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책을 파는 사람)이 되었고, 목사로 선교사로 거듭나 제주도에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그 복음을 지켜내고자 일제의 모진 고문과 회유를 견디다가 결국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기풍 목사가 보인 삶은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 문제로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에 희망을 줬고, 다시금 교회가 부흥할 근원을 마련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6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