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 다큐멘터리 방영, 요점 정리] 위기의식 없어진 순간, 나라는 망한다

등록날짜 [ 2014-04-22 11:54:45 ]



지난 4월 13일(주일) 오후 전 성도는 월남 패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약 50분간 시청했다. 우리 교회는 1975년에 망한 월남이라는 나라가 현재 우리나라 실정과 너무도 비슷하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자는 취지로 방영했다. 다큐멘터리 내용을 일부 요약 정리해 보았다. <편집자>

1975년 3월 10일 월맹(북월)은 파리 평화협정을 깨고 월남을 침공했다. 침공 직후 36시간 동안 월남사람 26만 명이 학살됐다. UN의 경고로 캄보디아와 같은 대량 학살을 간신히 면했다.

월남사람이 누리던 모든 자유도 박탈됐다. 화폐개혁으로 구화(舊貨)는 무효가 됐고, 금(金)을 가진 사람은 총살당했다. 장사도 할 수 없게 됐다. 무려 116만 명이 보트피플이 돼 해외로 탈출했고, 그 중 11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350만 명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재교육이라는 명분이었다. 월맹 당국은 “몇 주간 교육을 시킨 뒤 집에 돌려보낼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는 달랐다. 수용 기간도 무한정이었다. 월남에서 반정부시위를 주도하던 좌익까지 모두 잡혀갔다. 골수 몇몇을 빼곤 친월맹 인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번 반역하면 또다시 반역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수용소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해체되기 시작했다.

26만 명 학살, 350만 명은 수용소행
공산화 직전 월남에서 평화체제 실현에 앞장섰던 정치인이 있었다. 쭝 딘쥬라는 인물이다. 그는 1967년 월남 대선에 출마해 이렇게 주장했다.

“내전으로 시체가 산을 이룬다. 외국군까지 끌어들였으니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우리는 동족이다.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다. 나를 찍어 달라.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북폭을 중단시키겠다.”

쭝 딘쥬는 스스로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민주주의 신봉자이자 진실한 불교도라고 주장했다. 당시는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몰랐다. 쭝 딘쥬는 대선에서 티우에 이어 2등을 했다. 그는 대통령은 못됐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대미 로비를 통해 파리 평화협정을 이끌어낸다. 쭝 딘쥬는 월남 패망 후인 1978년 월맹의 거물급 프락치였다는 사실이 탄로 났다. 쭝 딘쥬에 놀아난 미국은 뒤늦게 그를 간첩 혐의로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공산프락치 대미 로비, 돌변한 미국
월남 공산화의 전환점은 1967년 선거 이듬해인 1968년 1월 31일 소위 ‘구정 대공세’다. 신년 명절인 3일간 남북은 휴전에 합의했지만, 월남 내 베트콩 특공대가 미국대사관 주요 건물을 공격했다. 구정 대공세 후 월남은 전국적인 베트콩 소탕에 돌입했고, 베트콩은 괴멸 직전에 처했다. 승리는 월남에게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문제가 생겼다. ‘구정 대공세’로 미국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대사관이 점령당할 정도니 이제 큰일 났다”는 비관론이 일어났다. 쭝 딘쥬가 1967년 대선에서 주장한 대북협상론에 관심이 모아졌다. 쭝 딘쥬는 이때를 놓칠세라 맨스필드, 훌브라이트, 맥거번, 케네디 의원 등 중진들에게 선을 댔다. 결국 미국은 1968년 5월 평화협상을 개시했다. 티우 대통령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다 이긴 전쟁이다. 북폭으로 월맹 사기는 위축됐다. 지금 모든 전투에서 이기고 있다. 조금만 밀어붙이면 완전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티우의 호소는 미 상원 중진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이들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 전에, 쭝 딘쥬의 대북협상 제의를 수용하라고 존슨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었다. 쭝 딘쥬는 티우에 대한 정치 공세를 강화했다. 티우도 한계에 부딪쳤다. 결국 1973년 10월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겹겹으로 안정장치 파리협정은 휴지조각으로
파리협정에는 겹겹으로 안전장치가 있었다. 12개국이 이 조약을 담보했다. 미국은 월남과 방위조약을 맺어 월맹 침공 시 공군·해군이 즉각 개입, 북폭(北爆)한다고 약속했다. 월남의 병력을 125만 명으로 증원했다. 당시 월맹의 111만 명을 앞지르는 수치였다. 신 무기를 공급받은 월남 공군은 세계 4위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하게 됐다. 여기에 미국은 80억 달러의 재건 비용까지 지원했다.

파리협정이 체결된 배경에는 월맹에 대한 방심도 한몫했다. 당시 월맹은 그야말로 ‘거지’였다. 국민이 하루에 두 끼만 먹는데도 한 해 100만 톤이 모자랐다. 부식은 소금이 전부였다. 군인은 부서진 타이어를 잘라 샌들을 만들어 신었고, 누더기 속옷에 월남에서 빼앗은 옷을 걸쳤다.

당시 티우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월맹은 저대로 놔둬도 10년 내 망할 겁니다. 월남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경제개발입니다.”

월남은 키신저가 만들어놓은 파리협정의 안전장치와 80억 달러의 재건 비용에 취해 ‘평화의 신기루’ ‘평화의 환상’에 들떠 있었다. 누구도 월맹이 남침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우리의 교훈
김정일은 연방제로 한반도를 적화통일 구상한 후 이런 계획을 세웠다 한다.

“1000만 명은 해외로 탈출하도록 내버려두고, 남북한 5000만 명으로 ‘통일국가’를 만들겠지만, 남한의 700만 명 정도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여기에 700만 명은 누구일까? 최소한 참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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