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을 맞으며] 구원의 사랑을 확증하는 위대한 징표

등록날짜 [ 2016-03-29 16:47:56 ]

예수 부활, 승천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성경 속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것이 되어야

우리의 신앙생활은 생명에 대한 갈망이다. 육신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예수 생명과 그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영혼의 때에 천국에서 누릴 영생, 그리고 은혜받은 때에 약동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리스도인만의 자산이다.

이 생명의 자산은 인간인 우리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부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 중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부활로 이루신 구원의 밑천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법 앞에 모두 죄인이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세상의 그 어떤 윤리나 법보다 엄격하다.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고 하여 마음의 간음을 죄의 범주에 포함하셨다.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고 하여 예수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품은 적대감을 결코 작지 않은 죄라고 선포했다. 다른 법은 차치하고 이 두 가지만 보더라도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정신의 순결함까지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 죄로 우리는 마귀에게 속한 자 되어, 이 땅에서는 영육의 고통을 받고 끝내는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방치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인간의 죄악을 그냥 없는 셈 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죄의 결과로 당하는 정녕 죽으리라는 법을 폐하지 않으신 것이다. 대신 인간에게 닥칠 죄의 대가를 없애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인간 대신 고난받고 죽게 해, 죄에 따른 사망의 법을 집행하셨고 인간에게는 구원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에 순종하셨고 마침내 부활.승천하셨다. 그의 부활은 예수 자신의 무고함과 그가 받은 고난과 죽음이 사실 인간이 치렀어야 하는 것임을 입증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고난과 죽음은 예수께 속한 것일 뿐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주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셨음을 보인 위대한 징표다.

회개와 전도로 부활의 목적 성취해야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회개와 전도다.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은 구원의 밑천이지 구원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구속사역을 밑천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받아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 회개가 없다면 죄 사함이 없고, 피의 고난으로 점철된 예수의 구속사역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구원받지 못하는 당사자에게도 비극이지만, 그의 구원을 위해 고난받고 목숨 내놓으신 예수께도 비참한 일이다. 목숨 걸고 평생 모은 1억 원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주었건만 그가 그 돈을 손에 쥐고도 굶어 죽었다면, 이는 부자 모두에게 얼마나 참담한 일일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신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짓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또 회개하여 꼭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살아서는 예수 이름으로 사단, 마귀, 귀신, 질병을 쫓아 생명력을 향유하고, 영혼의 때에는 천국 영생을 소유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여 많은 사람이 동일한 축복을 누리게 한다면 예수 피의 공로는 더 가치 있는 것이 되고 부활의 영광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값없이’ 받은 것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그때 ‘값없다’는 것은 그 값을 우리가 치르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 누구도 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죄 사함받고 악한 영을 쫓아 생명을 누리며, 천국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값을 지불하신 예수의 공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은혜를 누릴 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감당하신 고난의 분량과 그에 대한 감사를 망각해선 안 된다. 세상에서도 누군가 애써 이룬 업적을 내게 거저 준다면 그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양심의 발로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감사는 조물주께서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아껴 주신 사랑 그 자체를 향해야만 한다. 굳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더라도, 세상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면 그 자체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통령이 내 이름 석 자만 기억해 줘도 자랑으로 여길진대,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나를 위해 아들을 죽였다면 그때의 감격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부활을 내 것으로 소유해야
올해도 부활절이 돌아왔다. 우리는 예수 고난과 부활로 얻은 생명 그리고 구원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혹시 내가 말하는 구원론과 예수의 구속사역에 대한 감사가 그저 진실 없는 ‘입버릇’이 되지는 않았는지 한번 돌아볼 일이다. 그것은 단지 대화의 소재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의 소유여야 한다.

부활절을 맞으며 내가 부활의 소유자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해보자. 나는 진실로 회개하고 있는가. 나를 위해 예수께서 감당하신 고난의 분량을 기억하고 있는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극단적 선택도 마다하지 않으신 주님 사랑에 진실로 감격하고 있는가.

이계룡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7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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