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5-19 18:21:51 ]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천국을 예비하셨으니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하시는 성령께 모든 것 맡겨야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 미신이라 치부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 이 편지를 보내면 7년간 행운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3년간 불행할 것입니다.”
살면서 누구나 한 통씩은 받아 보았을 ‘행운의 편지’의 일부분이다. 수차례 편지를 받아 본 사람도 많다. 꽤나 오래전부터 시작된 이 편지는 ‘받은 편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면 큰 행운이 생기나, 그렇지 않으면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내용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야 농담으로 생각하고 쉽게 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크고 작은 불운이라도 겪을라치면 ‘편지를 받고 전하지 않았기 때문인가?’라며 불안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입시나 승진 등 인생의 중대사를 목전에 둔 사람일수록 행운의 편지의 ‘협박’을 쉽게 눈감지 못한다.
행운의 편지의 질긴 생명력은 참으로 가여운 인간의 처지를 반영한다. 인간은 불과 1분 후 자기 운명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의 불확실성과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동네 구석구석에 있는 점집, 사람마다 제각각 가진 징크스도, 인간이 불확실성과 한계상황을 이겨 보고자 만들어 낸 여러 모양의 우상들이다. 이른바 ‘능력 있는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을 불안 극복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알다시피 그런 물질적인 수단도 딱한 인간의 신세를 근본적으로 고쳐 주지 못한다. 특히 죄와 그에 따른 지옥의 영벌 같은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복음을 소유하게 하신 성령
참진리인 성경은 인간이 육신의 때와 영혼의 때에 겪는 온갖 고통과 저주의 근원을 ‘죄’라고 밝히며 유일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인간의 가여운 처지가 죄로 말미암아 도래했다면, 인간은 그 불행을 해결할 밑천을 예수로 말미암아 선물받았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처참한 운명을 바꿔 주시려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담당할 죄의 삯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신 담당하신 후 부활 승천하셨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로 거룩해진 자들 안에 내주하시며 예수께서 이루신 뜻을 땅 끝까지 전해 주신다. 우리는 불행을 끝낼 밑천이 이미 예수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전해 들었고, 그 밑천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할 지식과 힘을 얻었다. 성령이 없이는 성경을 통해 전해 오는 주님의 명령이 인간 영육 간에 형통케 할 복의 길임을 알 길이 없다. 뜻을 알지 못하면 그 명령을 준행할 의욕과 힘 역시 얻을 수 없고, 당연히 복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우리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또 풍성한 복을 받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가져야 할 사항이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압적으로 임하거나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려면 우리는 성령께서 편안히 임하실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성령 충만을 진실로 사모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성령의 전’인 우리 자신이 성령의 본질과 동일하게 거룩해져야 한다. 거룩은 곧 죄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 우리는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회개 없는 성령 충만은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전에 임하신 ‘여호와의 신’이, 예수 이후의 성령처럼 인간 속에 내주하실 수 없었던 까닭도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지 않으면 성령 충만할 수 없음을 입증한다.
성령 충만을 위해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도록 하려면 성령께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 성령은 인격을 무시하는 강압적인 분이 아니시기에 성령의 뜻대로 이끌리지 않는 자에게는 역사하지 않으신다. 인간이 성령의 뜻에 순종치 못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성적 사고에 대한 집착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는 동물의 사고 능력에 비하면 월등히 뛰어나지만, 사실 하나님의 생각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고 선포한다(고전1:25).
사냥과 채집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동물들이, 저수지를 건설해 농사를 짓고 양식을 저장하며 사는 인간의 장기적 안목을 이해할 수 없듯이, 차원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은 차원을 넘어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뜻이 진리인데도 아둔한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을 비이성적·비합리적으로 여긴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항상 이성적 사고와 어긋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은 성령의 뜻을 자신의 ‘합리적’ 생각보다 우선해야 한다.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성령의 뜻은 진리이며, 성령의 뜻과 거리가 먼 생각은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비진리다. 성경은 진리인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을 주님이 끝까지 책임지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크게 쓰시는 사례를 반복해서 보여 준다.
성령 충만만이 인간의 본원적 불행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임을 알기에 많은 성도가 성령 충만을 간구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바라는 열망에 비해 성령을 충만히 받을 만한 준비는 대개 소홀하다. 우리는 회개로 거룩해지고 성령의 감화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야 한다. 성령강림절 성회에서 담임목사를 통해 성령께서는 자기 자신을 밝히 알려 주셨다. 성령의 특성을 바로 이해하고 성령을 잘 모셔 그 뜻대로 이끌리는 삶을 사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계룡 집사
(35남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48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