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04-14 07:06:21 ]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의 고난이 다름 아닌 ‘내 죄’때문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마음으로 모든 고난을 소유해야
“나는 죽어도 너만은 살라” 기쁨으로 지신 십자가
고난주간은 사순절 40일 중 마지막 1주일에 해당하는 기간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 전 토요일까지를 말한다. 예수의 마지막 1주일인 고난주간에는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대사건들이 숨 막히게 전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에게 붙잡혀 대제사장 가야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고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로마 병정들에게 채찍질당하신 예수는 자신이 처형될 십자가를 지고 ‘슬픔의 길(Via Dolorosa)’을 따라 골고다(갈보리) 언덕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고난주간은, 들림받을 믿음을 갈구하는 성도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소유하게 한다. 예수께서 로마 군병에게 넘겨져 살 찢기고 뼈가 드러날 만큼 심한 채찍질을 당하고 침 뱉음과 온갖 모욕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이 ‘나’와 도저히 뗄 수 없는 사건임을 확인하는 절기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만나지 못한 사람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는데 왜 내가 예수를 죽였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예수를 채찍질한 것이 다름 아닌 ‘내가 짓는 죄’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한 독설’, 그 결과로 당해야 할 ‘질병’, ‘내 부끄럽고 추악함 그 자체’였음을 깨닫는 순간,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역사적 고증을 참고하면, 로마 군병들의 채찍 형벌은 사형은 아니었지만 형 집행 도중 많은 이가 죽었다. 채찍질 한 번에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살이 심하게 패여 장정이라도 대부분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의학적으로는 그렇게 채찍에 맞고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러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쩌면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다가 죽음으로써 자기들 손에 직접 피를 안 묻히고 ‘형 집행 중 사고사’ 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히12:2).
한 대, 또 한 대, 그리고 또 한 대…. 채찍과 갈고리들이 살점을 후벼 팔 때마다 우리 주님이 바라보신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이 고비만 넘기면 승리다. 내가 이렇게 고통당할 때마다 나의 자녀들이 산다. 질병에서 해방된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받을 저주를 끊고 나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사흘 만에 부활해서 나의 자녀들을 사망 권세자 마귀의 손아귀에서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게 된다. 참자. 지금은 저들이 나를 부끄러워하고, 나를 모르고, 나를 욕하고, 나를 미워하고, 나를 함부로 말하지만, 사랑한다. 다 이룰 때까지 조금만 더 참자.’
이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소망과 사랑의 의지가 사람으로 오신 예수의 육체적 한계를 초월해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다. 구레네 시몬을 시켜 중간에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한 것도, 주님의 몸은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고난주간마다 성회를 연다. 교회에는 다니지만 십자가 사건을 머리로만 알 뿐, ‘나’와 상관없는 역사로 아는 이들에게, ‘나의 사건’ ‘내가 죽인 예수’를 깨닫게 하고자 담임목사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영적인 깊은 말씀을 나누고 부활절을 준비하게 한다.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잘 아는 성령께서는 성령의 감독자로 세운 담임목사를 통해 ‘예수께서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보다, 빌라도 병영 뒷마당에서 채찍에 맞은 것보다, 가야바의 뜰에서 뺨 맞고 침 뱉음당하고 모욕당한 것보다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고 부인한 것이, 그리고 자신이 체포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제자들의 배신이 더 아팠다’고 말한다.
제자들이 배신할 줄 뻔히 알고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지금 우리에게 와 계시고 감독자로 세우신 주의 종을 통하여 또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주님 심정을 전해 주신다. 또 그때와 동일하게 성령 받은 성도들도 성령이 감화하시고 듣게 하심에 따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예수를 죽인 이가 바로 나임을 깨달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서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로 주신 영생에 감사하고 예수 몰라 멸망할 자에게 전도하길
“거기 너 있었는가.”
가야바의 뜰에, 빌라도 병영에.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죽인 자가 ‘나’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에게 보이시고 40일이나 이 땅에 머무르시고 한꺼번에 500명이 보는 앞에서 들림 받으신 감람산 현장에 있어 보지 않았다면,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고난주간성회에서 세상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실제로 가져야 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고자 겪은 고초와 사랑을 생각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금 산다는 감사가 넘쳐 나야 한다. 예수께서 고난받으신 이유를 바로 알지 못하거나 오해해 육체적인 고난만 생각하면서 금식하고 내 육체를 고통으로 몰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 내게 주신 평화와 치유, 죄 사함과 천국을 더욱 기뻐해야 하고 부활절에는 최상의 감사 축제를 펼쳐야 한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이루신 부활, 고난의 십자가를 희망으로 바꾼 극적인 사건이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모든 죄를 해결하려고 고난당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려는 것이니 그 고난에 동참하는 동시에 그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큰 뜻, 대속하신 십자가를 믿고 전 인류가 천국 가자는 복음 전도의 비전이 차고 넘쳐야 한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신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려는 것이다. 마귀가 주인 되어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다 마귀와 함께 지옥 가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진정 예수를 믿는다면 주인 뜻대로 모든 사람이 구원 얻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8~9).
고난주간은 예수 몰라 지옥 가는 수많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더욱 강조한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셔서 승리하셨고, 우리의 주인이 되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고 사망 권세 이기고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우리만 알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예수의 십자가 피의 공로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 성도들이 복음 전도에 더욱 힘쓸 구령의 열정, 예수 그리스도의 양심을 소유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오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52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