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11-08 10:03:07 ]
가장 중요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영혼 문제를 다루기에 소중한 연극
‘WANT’의 이중 의미
연극 타이틀, ‘WANT’는 이중적이다. ‘소원’을 말하지만 동시에 ‘부족’을 뜻한다. 사람은 그들 각자의 소원을 갖는다. 이는 그들의 부족함 때문이다. 소원을 갖는다는 말은 곧 자신의 결핍을 드러낸다. 당신은 무엇을 소원하는가, 이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 준다. 공부 잘하기를 소원할 때 우리의 정체는 고작해야 중·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이다. 돈이 내 소원이라면 내가 돈에 매여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소원은 우리의 정체를 드러낸다.
‘나는 하나님을 소원합니다.’ 이때 우리의 정체는 ‘영혼’이다. 자신을 영혼으로 인식하고 영혼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육체로, 또는 몸으로 보고 그렇게 믿는다. 물론 착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크리스천의 시선은 늘 그러하듯이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다. 어떤 이는 사람을 몸과 육체를 보고 판단하여, 그 사람의 돈과 지식과 계급과 권력을 보고 감탄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사람을 영혼으로 보고 판단하여, 그 사람의 영혼의 깊이와 사랑의 넓이와 희생과 겸손의 수준을 파악한다. 전자는 세속이고, 후자는 크리스천이다.
: 그리고 가져와. 그 영혼! 너 내 말 명심해. 남을 죽여야 네가 사는 거야. 그리고 가져와, 그 영혼! 그 영혼! 그 영혼! 난 너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넌 나에게 영혼을 주기로 했잖아!
그런데 영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자가 또 하나 있다. 그게 악마다. 악마는 인간을 알고 있다. 인간의 육체와 재물과 권력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혼! 영혼! 영혼!”을 가져오라고 소리지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소원 대신에 영혼을 팔아넘긴다. 돈을 추구하고, 재물을 소원하고, 소위 사랑을 갈취하고, 드디어 우리의 영혼을 악마에게 건네준다.
: 너는 나에게 소원을 들어 달라고 했고, 난 너에게 영혼을 달라고 했을 뿐이야. 넌 세 가지 소원에 영혼을 판 거잖아. 외롭다고, 사는 게 힘들다며, 돈만 많이 벌게 해 주면, 아까 그놈만 갖게 해 준다면 네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고 나랑 계약한 건 너야.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이미 네 영혼은 내 거야.
너무 바쁘기 때문에 영혼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 가지’ 소원이 있다. 돈과 명예와 사랑, 이것만 있으면 참으로 행복하리라고 믿는 바로 그것, 그래서 그것이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믿는 바로 그것,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 자신을 허비하고 몰두하게 하는 그것! 영혼이라도 팔아서 갖고 싶은 그것이 있다. 주인공은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다. 그래서 소원을 이룬다. 대신, 그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사그러진다. 왜일까? 회사 풍경은 이렇게 그려진다.
: 지긋지긋한 회사생활. 차변이랑 대변 값이 안 맞잖아?!
: 야, 뭣들 하는 거야!! 오늘까지 다 해야 되는 거 몰라?! 야근하고 싶어?
: 어휴,정말 내가 회사를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 야, 빨리빨리 일해. 너 승진 안 할 거야 인마!
: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 뭐야, 서 대리 안 왔어? 과장이 왔는데 대리 나부랭이가 안 와? 정신 못 차렸구먼.
: 미친 거 아냐?
: 아직 안 왔어!? 이 친구 시간이 몇 신데 아직까지 안 오고 지랄이지? 이 과장. 닥쳐! 자네는 어떻게 근무 태도가 참 지랄같구먼. 서 대리.
: 네,죄송합니다. 이게 무슨 직장이 아니라 전쟁터잖아!! 이런 게 아니야!! 이런 게 아니야!! 이런 게 아니 라고!!
그렇게 낮선 풍경이 아니다. 일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회사는 우리가 고대하는 소원 중 하나이고 일터이고, 삶의 터전이다. 그런데 회사에서 보내는 일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쁜 시간이다. 바쁘기 때문에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없는 상황, 그것이다. 몰두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나를 놓쳐 버린다. 바쁘게 일해서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원하는데, 정작 나는 사라지고 나를 잃어버린다. 바쁨의 정체다. 영혼을 판다는 말은 내가 몰두해야 할 일 때문에 내 영혼을 위한 시간을 놓쳐 버리고, 이 세상에 속한 것에 내 삶 전체를 쏟아붓는 것이다.
<사진설명> 첫 소원을 빌어 대기업에 들어간 주인공은 전쟁터 같은 직장생활에 짓눌린다. “좋은 직장 가지면 행복하다고 누가 그랬어”라는 악마의 비아냥에, 두 번째 소원을 말해 ‘재벌’이 되지만 ‘돈’ 역시 참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홍준 기자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몸의 오감으로 반응하고 감각한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갈하면 물을 마시고, 졸리면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신문을 읽고, TV를 보고, 친구들과 말을 나누고,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한다. 어느덧 하루가 가고 시간이 흐른다. 하루를 되돌아보면 진짜로 바빴다. 뭐, 특별히 한 일도 없다. 그런데 끝없이 바쁘다. 누군가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토록 바빠야 하는 이유가 있나?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고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크리스천의 중요한 기본 일이지만, 사람은 결코 먹고사는 일에 자신을 몰두해서는 안 된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나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몰두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해 있고, 그분만이 지극한 평안과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너무 바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하는 기원(起源) 의식과 내 생명과 내 삶의 기반과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바쁘다는 핑계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너무 바쁘기 때문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과 신앙을 놓친다. 나 자신의 삶이 어떻게 기원되었고, 어떻게 죽음과 내 삶의 마지막을 마주 대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래서 숙고하지 않는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바쁘기 때문에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내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놓쳐서 안 된다.
사람은 여전히 이중적이다. 단선적이고 세속적인 자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전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또 다른 세계를 확신하고 믿는 데에 비롯된다.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을 구분해 내는 결정적인 지점은 죽음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믿는 데 있다. 얼마 전 안철수 대표는 “인간 삶은 이 세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다가 저 별의 먼지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확실하게 유물론자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전부라고 믿는다. 죽음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너와 내가 구별되고 서로 인식하고, 이 땅의 삶은 천국 삶의 일정한 토 대 가 돼 연속적이라는 믿음은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인식이며 믿음이다.
진짜 나는 육체가 아닌 영혼
연극은 영혼을 우리가 늘 입는 겉옷과 우리 몸의 관계로 설명하여 영혼에 대한 앎을 깨닫게 한다. 사람이 자신의 겉옷을 몸보다 귀중히 여기지는 않는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그렇게 우리의 진짜 존재-겉사람과 속사람의 관련처럼-를 놓치는 우(愚)를 저지른다.
: 그러니까 겉옷을 잠깐 벗어 주세요. 모든 문제는 다 이 옷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벗으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 옷이 문제였습니다. 당신은 모르는 게 당연하죠. 이 옷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옷 들고) 이 옷, 이 옷 때문에 당신은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대신 이 옷을 처형하도록 하겠습니다!! (옷을 패대기치며) 이야앗! 이 나쁜 놈 난 네가 싫어 (물어뜯으며) 악! 나쁜 놈!
바로 그거예요! 당신 육체도 마찬가지라고요! 서지환 씨! 당신 육체는 한낱 70~80년이면 없어질 그 옷과 같다고요. 이와 같이 그 여자가 나타나서 심장병으로 당신 육체를 아무리 망가뜨려 봤자 당신의 영혼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당신 옷을 아무리 망가뜨려도 당신 육체를 건들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여자에게 세 번째 소원을 빌고 당신의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면,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빼앗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환 씨, 육체는 말입니다. 그냥 입고 버릴 이 옷과 같다고요. 그렇다면 세 번째 소원을 빌지 말고 당신의 영혼을 지키는 게 유일한 해결 방법 아닙니까?
…당신 영혼의 행복이야말로 진짜 영원한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사진설명> “당신 육체는 이 옷과 같습니다.”
변호사 ‘이복음’은 주인공에게 인간의 ‘실체’는 ‘영혼’이고 영혼이 행복해야 진정 행복을 느낀다고 전한다. 예수를 투영한 ‘이복음’은 죽기 직전인 주인공에게 심장을 대신 내어 주고, 예수만이 인간 영육을 행복하게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제시한다. 김진욱 기자
우리 눈은 영적 현실에 가려 있어서, 눈에 띄는 겉옷만 본다. 그러나 겉옷은 내가 아니다. 겉옷은 단지 내가 걸쳐 놓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껍데기는 가라! 겉옷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껍데기다. 우리의 진짜는 우리의 영혼이다. 영혼을 놓치면 모든 것을 다 놓친다. 왜냐하면 영혼은 우리 자신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은 우리의 전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사실, 성경이 말씀하는 영혼은 몸과 겉옷의 관련처럼 단순하지 않다. 때로 겉옷처럼 몸은 사그러지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몸은 때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기도 하다. 몸에 대한 일방적 경멸은 성경을 때로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겉옷과 몸을 비유로 하는 영혼에 대한 대사는 영혼의 현실을 금세 알게 한다.
악마는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그의 영혼을 달라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고전 이야기지만,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영혼이 무엇이냐?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하찮게 보인다. 한 줌 공기를 누가 귀하게 여기는가? 언제 어디서나 공짜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찮게 여긴다.
공산당도 무서워한다는 중2가 엄마에게,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라고 엄마를 하찮게 여기고 구박하고 멸시한다. 엄마가 그 녀석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서 멸시한다. “엄마, 그까짓 게 뭐람!” 똑같다. “영혼, 그까짓 게 뭐람?” 그런데 영혼을 팔라고 하니까, 그건 안 된다고 하면서도 막상 “영혼이 뭔지나 알아?”라고 물으니, 영혼이 뭔지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영혼의 가치는 악마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악마는 영혼을 그의 탐욕을 채우는 천상의 음료처럼 마시려 한다. 그래서 그의 몸집을 불린다.
: 내가 너한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넌 나한테 네 영혼을 주면 돼.
: 아. 영혼! 아니, 지금 아가씨에게 내 영혼을 팔라고요?
: 왜 이렇게 놀라? 영혼 그까짓 게 뭐라고?
: 아이, 그래도 내 영혼은 안 되죠.
: 너, 영혼이 뭔지나 알아?
: 당연히 모르죠!!
: 거 봐, 중요하지 않으니깐 뭔지도 모르지. 원래 그래. 나도 그랬어. 이 몸뚱아리가 전부인 줄 알고, 이 육체만 행복하면 진짜 행복한지 알고.
성경은 끊임없이 영혼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밤 너의 영혼을 도로 찾아서 데려가면 네가 쌓아 놓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은 흙으로 만든 눈에 보이는 물질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물질로서 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 먹고, 마시고, 자고, 싸고 한다. 동물과 이 점에서 경계선이 없다. 이게 유물론이다. 물질 외에는 다 거짓이다. 사람이 짐승처럼 굴 때, 이 말은 딱 맞는 말이다. 사람은 짐승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영혼은 사람의 핵심이다. 아니, 실상 사람은 그 자체로서 영혼이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 있는 영혼(생령)이 되었다고 하신다. 사람은 동물처럼 보일 뿐이다. 사람은 흙으로 된 물질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숨길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사람이다. 하나님의 생기와 형상이 없었다면 사람은 짐승에 그친다. 사람이 진정 가치 있는 이유는 사람에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생기가 함께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영혼이라는 말에는 ‘목구멍’(네페쉬, 창 2장)이라는 뜻이 있다. 갈망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은 마치 목구멍처럼 밥을 먹고, 물도 마시고, 친구도 마시고, 아내도 마신다. 그래서 자신을 타자로 채운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네페쉬는 비어 있는 공허이고,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네페쉬는 사랑도 먹고, 탐욕도 먹고, 돈도, 명예도, 권력도 게걸스럽게 들이마신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을 마셔야 산다. 사슴이 목이 갈하여 헐떡이며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사람은 비어 있는 목구멍으로서 헐떡이면서 하나님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시고, 하나님으로 그의 영혼의 갈증을 채울 때에야 비로소 안식에 들어선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 헤매었나이다. 하나님으로 나의 빈공간을 채우기까지는 결코 내게 평안이 없었나이다.”(어거스틴)
나가는 말
연극 ‘원트(WANT)’에서 절실히 다가오는 것은 연세중앙교회 젊은 청년 대학생들이 그 큰 예배당에 가득 들어차 있고 다른 예배실까지 차고 넘치도록 모여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다름 아니라 그 청년들의 영혼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영혼의 사랑 때문이리라. 교회의 독특성은 바로 영혼 문제에 있다. 영혼 문제를 소중하게 다루는 교회는 부흥을 열매로 맺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과 영혼 구원, 바로 그것이다.
영혼은 마치 잃어버린 언어와 같다. 누가 어디서 영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싶다. 고작 영혼은 사람의 깊이를 드러내는 정도로 사용된다. 원트(WANT)는 영혼을 주제로, 영혼을 위하여, 영혼을 말하는 귀한 연극이다. 영혼이나 복음이 들어가는 연극이나 영화들의 수준이 말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러나 WANT는 소중하다. 영혼을 다루기 때문에 그렇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심장을 바꿔치기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 하고 흐른다.
어느 피아니스트가 연세교회에서 파치올리 피아노를 발견하고는 “어떻게 교회 안에 이런 피아노가 있지?”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이런 탁월한 연극이….
/김병제 목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기획국장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
위 글은 교회신문 <55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