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8-01-04 14:02:31 ]
“많은 사람 지옥 가지 않게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자의 책임이요, 교회의 책임이요, 특별히 우리 교회의 책임”
예수의 피 흘리심이 헛되어서는 안 되기에…
<사진설명>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옵니다. 산보다 하늘보다 높은 곳에 떠 있는 붉은 해처럼 주님의 ‘영혼 구원’ 명령을 인생의 일순위에 두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2018년을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길 소망합니다. 육신으로는 소망을 찾기 어렵더라도 내 영혼은 올 한 해 주님 뜻 안에서 감사하고 만족하기를 소원합니다.
연세중앙교회 신문 ‘영혼의 때를 위하여’ 제작팀인 신문발행국은 지난 12월 27일(수) 오전 목양센터 2층 신문발행국 사무실에서 윤석전 담임목사와 신년 특별 인터뷰를 1시간 동안 진행했다. 제작팀은 윤석전 담임목사에게 2018년 교회 표어와 믿음의 스케줄을 정한 배경을 질문했고, 윤석전 담임목사는 제정 배경과 더불어 현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어떤 각오와 다짐으로 신앙생활 해야 하는지 자세히 당부했다. 연세중앙교회 성도들이 새해에 주님과 담임목사와 한마음 되어 주님 뜻을 이루자는 담임목사의 진심 어린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육신은 누구나 백 년 안에 흙으로 사라지지만 영혼은 영원히 삽니다. 인생의 때는 내 영혼이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살아가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형벌을 받듯 하나님의 법에 저촉되면 형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영원하기에 형벌도 영원한데 그 장소가 지옥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죗값으로 받는 지옥 형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인간의 언어로 형언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참혹한 고통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힘으로도 인간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건져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기에 영원히 사시고 죄가 전혀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으신 분이시나 이 땅에 오셔서 지옥 갈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 사망인 인류의 죗값을 갚아 주셨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육체가 온갖 고난을 당해 살 찢기고 피 쏟을지라도 너희만은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 찢기신 살, 그의 죽음은 우리의 지옥 갈 죗값을 능히 갚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 죗값을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내가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지옥에서 죗값으로 영원히 당할 고통은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잔인한 고통을 당하시고 피를 쏟아 죽으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승천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왜 저주받고, 왜 채찍에 맞고, 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는지를 모르면 죗값으로 지옥 가니까 주님께서는 먼저 믿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증인이 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마28:18~20).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신 것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요6:38~40). 이 사실을 알기만 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데, 예수가 죽어 죗값을 갚은 사실을 몰라서 지옥 간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고 예수의 피 흘리심이 헛되어서는 안 되기에 어떻게든 전해서 죄로 지옥 가는 문제만은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승천 바로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예수를 말하는 ‘전도’입니다. 예수가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으며, 왜 죽었으며, 왜 부활하셨으며, 왜 다시 오시는지를 일러 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너를 위한 것이니 예수 믿고 천국 가자, 구원받자”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알고 보고 믿고 전해 주면 사는데, 안 전해 줘서 지옥 가게 한다면 먼저 믿은 자로서 직무유기요, 참으로 잔인한 사람입니다.
오늘까지 우리 교회의 존재 목적은 주님의 지상명령인 전도, 바로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사업은 영혼 구원을 뒷받침하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전도하자’는 뜻의 표어를 정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전도요 영혼 구원이니,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할 일도 전도고 영혼 구원입니다. 우리 교회의 최고 사명인 ‘주님의 지상명령 전도로 영혼 구원 이루는 해’는 끝없이 진행해야 할 일입니다. 담임목사가 주님의 지상명령 전도와 영혼 구원에 애타도록 힘쓰고 생애를 다 내놓고 몸부림치는 이유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고, 성령이 제자들을 통해 그렇게 하셨고, 우리 교회도 주의 종과 성도들을 성령께서 그렇게 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이 헛되지 않도록 수많은 영혼이 지옥 가지 않게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책임이요, 교회의 책임이요, 특히 우리 연세중앙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표어를 정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를 실천하고자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성도들이 생활화할 믿음의 스케줄을 세웠습니다.
첫째, 우리는 기도하여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마귀와 죄에 사로잡힌 수많은 영혼을 해방시켜 구원하려면 마귀보다, 죄보다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영혼조차 죄에서 끌어낼 능력이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우리 힘으로 전도할 수 없기에 주님이 일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좇겠다고 그토록 맹세했지만, 정작 주님의 고난 앞에서는 그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갚으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는 제자들에게는 가당찮은 일입니다. 그때 예수 믿는 자들은 통치권에 위협을 가하는 세력으로 여겨져 어떻게든 옥에 가두고 죽이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에서 500명이나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 말씀을 들었지만 380명이 도망가고 120명만 마가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열흘간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이 충만해져서 방언을 말하고, 예수의 도(道)를 전하는 자들을 잡아 가두는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서 너희가 죽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외쳤습니다. 무식한 어부 베드로가 회중에게 “회개하라”고 강력히 외칠 때 하루에 3000명, 5000명씩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기도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권능이 아니고는 전도해서 그 수많은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무조건 죽이려는 무서운 상황 속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소서” 외친 사람들이 어떻게 무지한 어부 베드로의 말을 듣고 회개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권능이 함께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기도해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겨 주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처음에 교회 올 때 ‘교회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합니다. ‘교회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곳이구나’ 느끼고, 동시에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진실한 사랑은 예수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서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한 사랑이구나’라고 깨달을 때, 드디어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그에게 이루어져 구원받습니다. 그에게 예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교회에 오는 모든 새가족을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주님처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은 주 안에서 사랑으로, 말씀으로, 믿음으로, 주님의 지상명령 전도를 이루는 데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피로 거듭난 형제로서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천국에 가야 합니다. 이런 모토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려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사랑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나누고, 무슨 말을 할지라도 주님 사랑, 살 찢고 피 흘리신 그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 사랑의 모든 목적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사진설명> 붓글씨로 쓴 2018년 연세중앙교회 믿음의 스케줄. 석계 이기산(한국전통미술대전 초대작가, 현 한국미협회원).
◇ 현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세 ◇
영혼의 때를 확실히 준비하는 신앙
남북대치 안보위협, 차별금지법 제정 성적 타락, 무너진 윤리 도덕 등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실 앞에 주님 재림의 종말론적 신앙관 가져야
‘오늘 내가 주님 만날 준비 됐나?’ 점검하고 영혼의 때 확실히 대비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말씀으로 살려고 할 때, 또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악한 마귀역사는 언제나 방해하고 역사합니다. 예수 믿노라 하는 성도들도 갈수록 악해지는 시대 속에서 세상 문화에 젖고 있습니다. 집에는 TV가 있어 생각을 장악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뺏어갑니다. 책상 컴퓨터에는 인터넷이, 손에는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생각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무슨 신앙관과 국가관을 제대로 가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세상 문화에 모든 시간을 빼앗겨서 기도하고 전도할 시간이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피 흘려 구원하신 예수님께 있는 듯하나, 어떻게 먹고살 것이냐 하는 육신의 요구 앞에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빼앗기고 육신의 소욕대로 살게 됩니다.
그런 여러 상황을 바라볼 때 냉철하게 깊이 판단할 것은 “오늘 죽어도, 오늘 주님 오셔도 내가 천국 갈 수 있을까?”라는 신앙 점검을 확실하게 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준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세계의 흐름을 살펴보면, 지금 중학생에서 장년에 이르기까지 성적(性的) 타락이 만연합니다. 성적 타락의 끝은 동성애입니다. 마귀 사단 귀신이 장악해 동성애가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타고 말았습니다(유7절). 지금은 죄악의 도시를 불태우는 때가 아니라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입니다.
이 시대는 노아 홍수 때처럼 쾌락과 향락주의가 팽배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세계는 비정상이요, 윤리·도덕이 사라지고,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봐도 소수의 인권이 존중받아야 하는 잘못된 ‘인권 의식’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들도 ‘내가 교회 가기만 하면 구원받은 것 아냐?’ 하며 희미한 구원관과 신앙관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맘대로 세상에서 자유하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교회에 출석만 하면 예수 잘 믿는다고 오해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말세가 왔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세’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단이나 적그리스도나 거짓선지자에게 속지 말라고 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했는데 지금은 부모가 자식 말을 들어야 집안에 분란이 없고 조용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 말씀을 짓밟고 하나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우리 신앙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북한은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없앨 능력을 갖추고 계속 위협합니다.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나고 핵무기가 터져 목숨이 끊어진다면, 우리 영혼은 꼭 천국 가야 합니다. 지옥에 가 있다면 절망입니다. 현재 수많은 한국 성도는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하며 안일에 빠져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의 때를 위한 영적 준비를 하지 않는 모습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고 주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김정은은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를 만들며 적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혹시 모를 자국의 피해를 막고자 북한에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북핵 문제는 해결될 것인데, 만약 전쟁으로 해결된다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순간을 앞두었으니 어떤 각오와 준비를 해야 할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 재림의 때를 만나거나 어떤 문제에 직면해 내 목숨을 마감할 때, 내 영혼이 주님을 뵐 수 있도록 성도들이 깨어 경성하고 기도하여 준비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년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당장 오늘 일어날 일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재림은 그만큼 가까이 와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5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