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6-01-22 12:04:30 ]
타작마당에 바람 불면 알곡만 남고
생명 없는 겨는 모두 날아가 버려
우리도 생명 없는 겨처럼 심판 앞에
멸망해야 했으나 예수 속죄의 피로
거듭나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게 돼
타작마당이다. 바람이 분다. 농부가 키를 든다. 곡식을 공중에 던진다. 알곡은 무겁다. 제자리에 떨어진다. 겨는 바람에 날아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1:4). 앞 절의 시냇가 나무(시1:3)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나무는 뿌리가 있다. 폭풍이 와도 버틴다. 겨는 산들바람에도 날아간다.
겨의 모양은 알곡과 똑같다. 같은 이삭에 붙어 있었다. 같은 햇볕을 받았다. 같은 비를 맞았다. 그러나 속이 다르다. 알곡에는 생명이 있다. 겨에는 없다. 껍데기뿐이다.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구분할 수 없다.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산다. 때로는 악인이 더 번성해 보인다. 형통하고 부유하다. 의인이 고난당하고 악인이 웃는다. 불공평해 보인다. 그러나 바람은 반드시 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시1:5). 심판의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겨는 견디지 못하고 날아간다. 의인의 회중,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영원히 분리된다.
악인은 심판 앞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다리가 풀린다. 주저앉는다. 변명도 못 한다. 바람 앞의 겨처럼 속수무책이다. 꺼지지 않는 불못이다(계20:15). 영원한 형벌이다. 이것이 겨의 운명이다. 심판의 바람 앞에서 모두 날아간다.
누가 알곡인가. 누가 심판을 견디는가.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 여기에서 ‘인정하다’의 원어는 ‘야다(yadah)’이다. 단순히 ‘안다’는 뜻이 아니다. 깊이 안다. 친밀하게 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먼저이다. 십자가에서 흘린 속죄의 피를 보시고 나를 ‘내 자녀’라고 알아봐 주시는 것. 이것이 ‘야다’이다. 하나님과의 그 관계 안에 있는 자만 심판을 통과한다.
우리는 본래 겨였다. 속이 빈 껍데기였다. 심판의 바람 앞에서 날아갈 존재였다. 스스로는 알곡이 될 수 없었다.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분이 우리 대신 심판의 바람을 맞으셨다. 타작마당의 매질을 당하셨다. 찢기고 부서지셨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났다. 죽은 껍데기가 산 생명으로 새롭게 창조됐다. 겨가 알곡이 됐다. 자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제 심판의 바람이 불어도 두렵지 않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의 무게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람이 우리를 날려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바람은 우리 안의 남은 겨를 털어 낸다. 더 순수한 알곡이 되게 한다. 겨였던 우리가 알곡이 됐다. 오직 속죄의 피 때문이다. 심판의 날, 우리는 의인의 회중에 선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아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정하심 안에서 영원히 산다.
위 글은 교회신문 <9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