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열왕 이야기 <22>] 종교 혼합주의가 더욱 팽배

등록날짜 [ 2012-07-31 09:29:31 ]

사마리아 산(山) 사들여 왕조 유지에 사용
우상숭배 만연케 해 멸망으로 치닫게 하다

북이스라엘을 건국한 여로보암 왕조(여로보암, 나답)는 불과 2대째에 신하가 일으킨 모반으로 망했고, 왕권을 찬탈한 제2왕조 바아사(바아사, 엘라) 역시 2대째에 이르러 군사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제3왕조 격인 시므리는 불과 7일 천하로 그쳤고, 시므리를 무너뜨린 오므리가 제4왕조를 이루었다.

오므리 왕조 등장
오므리는 제2왕조 바아사 아들 엘라 왕이 통치한 시기에 이스라엘 군대 장관이었다. 오므리와 그 군대가 깁브돈에서 블레셋과 싸울 때(BC 876년), 병거 절반을 통솔한 장관 시므리가 수도 디르사에 있는 엘라 왕과 그 가족을 살해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하자 시므리는 디르사로 회군했다. 시므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을 알고 자살했다. 시므리는 7일간 나라를 다스렸을 뿐이다(왕상16:8~18).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이스라엘 사람 절반은 오므리를 지지했고, 나머지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추종했다. 이 두 파당은 디브니가 죽을 때까지 싸웠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에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아 저로 왕을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좇았더니”(왕상16:21).

오므리 왕조 초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백성의 절반 정도가 디브니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디브니는 백성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거목이었다. 더구나 오므리와 싸운 시므리 추종세력이 오므리를 두려워하므로 그들도 디브니에 합세했다.

오므리는 시므리를 제거한 직후부터 디브니와 힘겨루기를 했기에 사실 이스라엘 왕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세월이 자그마치 5년이나 지속됐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나날이었다. 왕이 사실상 두 사람인데다가 계속된 내전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막심했다. 긴 내전은 오므리가 디브니를 죽이고 나서 마감됐다. 그 사이 국론은 양분됐고, 국력은 쇠퇴했다.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다. 오므리는 디르사에서 6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사마리아에 정착하다

오므리 왕이 이룬 업적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들여 그곳에 북 왕국 새 수도를 세웠다. 예루살렘 북쪽 56km에 있는 사마리아 산지를 은 2세겔(68kg)로 사들여 성을 건축하고 왕궁을 지어 이스라엘 새 왕도로 삼았다. 하나님이 일찍이 율법으로 토지 매매를 금하셨는데도 북이스라엘은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었다.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왕상16:24).

그곳은 사실상 100년 이상 이스라엘에 난공불락인 수도가 되었다. 더욱이 사마리아를 사들여 오므리 왕이 군대를 징집할 땅이 생겼다. 이스라엘에서 땅이란 궁극적으로 각 지파에 분배한 여호와 소유로 간주하였기에, 왕은 군대를 조직하려면 각 지파의 선한 뜻을 따라야 했다. 그런데 사적으로 사들인 사마리아는 왕도(王都)가 되어 오므리가 직접 그 땅에서 자기 군대를 양성할 수 있었다. 각 지파가 지닌 권위는 무시됐지만 오므리가 지닌 권세는 막강해졌다.

또 내분에서 벗어난 오므리는 포괄적인 외교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 계속된 불화로 두 나라 모두 힘이 약화하는 것을 알았기에 유다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모압을 정복하고 그 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데 성공했으며, 아들 아합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외교에 능한 왕이었지만, 성경은 오므리 왕을 냉정하게 평가한다.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왕상16:24~25).

이 평가는 혼합주의적 종교 습관이 오므리 치세(治世) 동안 사마리아에 널리 침투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악이 지배하게 됐음을 뜻한다. 오므리가 왕위에 있은 12년간 초기에는 내전을 치르느라 편한 날이 없었고, 후기에는 건국 왕 여로보암 못지않게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9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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