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8-28 15:26:41 ]
개인 안위를 위해 이스라엘 왕과 연합 유지
악한 자와 멍에를 같이 하는 것 경계해야
여호사밧은 경건하여 하나님을 늘 공경하고 정직히 행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오점이 있었는데 바로 북이스라엘 임금 아합과 연합한 사실이다.
여호사밧은 아합 가문과 혼사를 맺을 뿐만 아니라 아합 집 사람들과 계속 왕래했다. 여호사밧은 길르앗 라못 원정에 아합과 같이 갔고, 아합이 죽은 후에는 후대 아하시야와 협력하여 아라비아 오빌로 금을 캐러 가는 일을 추진했다.
아하시야는 ‘심히 악한 자’라고 하였는데, 그런 자와 제휴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든 것이다. 성경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에 관해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다”(대하20:36)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하셨다. 선지자는 왕이 아하시야 같은 악한 자와 교제하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시어 왕이 지은 배를 파(破)하실 것이라고 했다. 배가 출발하였으나 과연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무역하기도 전에 파선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하시야는 그렇게 파선한 것을 보고도 다시 여호사밧에게 “우리가 다시 배를 지어서 나의 종과 왕의 종이 다 같이 협력해서 또 나가십시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여호사밧이 듣지 않았다. 두 나라가 진행한 공동 기업이 좌절하였으나, 다시 한번 합동으로 다시스 선단(船團)을 조성하자던 이스라엘 왕의 청을 유다 왕 여호사밧은 불응한 것이다.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였더라”(왕상22:48~49).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의 청을 거절한 것이 선지자 엘리에셀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책망하자 마음에 꺼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빌에 가서 채금(採金)하여 큰 수익을 내는 일이 현명하지 않은 정치적 처신이라 여겨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파선을 계기로 양국 공동 기업인 다시스 무역단은 그것으로 끝났다. 이처럼 여호사밧은 아합의 다음 대 왕인 아히시야와도 한동안 동맹하며 국부(國富)를 이루고자 꾀한 인물이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복을 잘 받아서 땅에서 좋은 열매를 내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옳은 일인지,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을 제 것으로 생각하여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자임에도 그자와 복을 나누는 것이 옳은지 여기서 배울 수 있다. 성경은, 인간적인 친분이나 교제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분배하는 것이 얼마나 낭비인지를 가르쳐 준다. 여호사밧은 유다 군사력은 물론 국가 부흥 기회까지도 악한 아합 왕과 나누었다. 우리는 여호사밧이 아합 때문에 큰 낭비를 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아합 집과 혼사를 맺은 일이다. 여호사밧은 자식 혼인을 아무렇게나 치렀다. 이 세상에서는 왕끼리 혼인해야 격식에 맞는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오므리 집안과 혼인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계승해야 할 다윗 계통과 그 백성이 아합 집안과 혼인하여 크게 고통받게 되었다.
아합 딸 아달랴는 여호사밧 아들 여호람의 아내가 되었다(대하21:6). 나중에 아달랴는 자기 남편이 죽고 막내아들 아하시야마저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나가서 싸우다가 예후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갑자기 쿠데타를 일으켜 다윗 씨를 전부 잡아 죽였다. 왕자들이 살해될 때 마침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갓난아기 요아스를 유모와 함께 성전에 감추어 두고 7년을 길러 반정(反正)을 꾀하였다.
결국에는 요아스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전 6년 동안은 아달랴가 통치했다. 이런 일을 생각할 때 여호사밧은 자기 당대에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은혜를 낭비했다. 특히 아합 집안과 그릇된 연관을 떼지 못하고 끝까지 붙들고 나갔는데 여호사밧 아들 여호람은 아합 사위로 아버지 여호사밧보다 심했다. 이렇게 하여 결국에는 자기 집에 들어온 아달랴가 그렇게 무서운 횡포와 포학과 잔인을 행했다. 이런 일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역사의 인과 관계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 잘못을 심고 좋은 열매 거두기를 바랄 수는 없다.
위 글은 교회신문 <30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