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포로 귀환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됐다(스3~6장). 2차 포로 귀환 때에는 에스라의 인도로 유대 공동체가 재건됐다(스9~10장).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인들을 지켜 줄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성문들은 불탄 채로 있었다(느1:3).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140년이 지난 때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금식하며 주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기도했다(느1:5~7).
당시 느헤미야는 바사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다(느1:11). 이방인(유대인)이지만 왕의 생명과 직결된 직책을 맡은 것은 그만큼 느헤미야에 대한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방증이다.
금식기도 하느라 수척해진 느헤미야를 본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물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느2:2).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이 무너져 있어 유다민족이 이방 적들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아울려 고국의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를 간청했다.
드디어 여러 날 금식기도 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 기도가 응답됐다(느2:8). 느헤미야에 의해 3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시작된 예루살렘 성곽 건축은 유다 각계각층 사람들이 참여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주변 사마리아 군대와 산발랏,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의 위협으로 두려움에 떨었다(느4:7).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파수꾼을 세워 밤낮으로 방비했다(느4:9). 유대 백성에게는 외부에서 오는 위협 외에 또 다른 큰 문제가 있었다. 유다 백성은 빚을 내어 세금을 내야 했고, 심지어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 할 정도로 빈곤했다(느5:4~5).
이를 헤아린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 세움을 받았을 때 이에 주어지는 합법적인 봉급을 받지 않았다(느5:14).
느헤미야는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유다 백성을 이끌었다. 또 하나님 말씀에 따라 백성의 삶의 개혁에 앞장섰다. 토지와 노예제도 정비(느5:8~19), 성전 청결(느13:4~9), 안식일 준수(느13:15~22), 이방인과 통혼 금지(느13:23~28) 같은 신앙 개혁을 이끌었다.
느헤미야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위치에 있었지만, 자기 민족을 보살피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0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