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4] 우리 연약함을 체휼(sympathize)하시는 하나님
등록날짜 [ 2017-08-17 15:06:09 ]
당신이 너무나 힘든 순간을 맞았다고 가정해 보자. 가령 길바닥에 앉아 동전 통을 두고 구걸하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살아갈 의욕마저 상실됐다고 하자. 그때 대통령이나 유명한 연예인, 혹은 엄청난 재벌이 지나간다고 치자. 그들이 당신에게 다가와 “얼마나 힘드세요? 기운 내세요”라고 따뜻한 말을 건넨다면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지나가는 사람 중에 “에구, 딱한 사람 같으니라고…” 하며 눈시울을 붉혀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동정일 뿐이다.
동정(compassion)은 com과 passion의 합성어다. com은 ‘함께’라는 뜻의 라틴어 어원이다. passion은 ‘감정’이라는 말의 헬라어 ‘(파토스)’ 파생어다. 따라서 동정(compassion)은 ‘느낌을 나누는 것’뿐이다.
이와 달리 ‘체휼’은 상대방의 입장과 같아지고 그 어려움을 나의 것으로 동일시하여 떠안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굶는 자를 위해 같이 굶고 나는 굶어도 내 것을 먹이려는 것이 체휼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체휼’은, 헬라어로는 ‘(숨파세오)’다. 헬라어 어원을 그대로 영어화하면 sympathize(심퍼사이즈)다. synchronize(싱크러나이즈, 일치시키다), symphony(심포니, 여러 음이 하나로 조합되는 것) 같은 단어에서 사용된다. 이때 어두 어원인 ‘syn’ 또는 ‘sym’은, ‘함께’ ‘같이’라는 의미인데 앞에서 설명한 감정의 어원 ‘(파토스)’가 합성된 sympathy(심퍼시), 즉 불쌍한 자와 ‘하나가 되는’을 뜻한다.
한자 체휼(體恤)의 ‘체’는 ‘몸 체(體)’로, 그냥 감정만 불쌍하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동일하게 그 처지를 몸으로 경험하여 긍휼히 여긴다는 뜻이니 얼마나 영감 있고 정확한 번역인가?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아픔, 질고, 질병, 가난, 고통, 무시당함, 비난, 무엇보다 지옥 갈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과 비교할 수 있을까? 우리 주님처럼 모든 일에 한결같은 어려움을 당하시고 자기를 버려 십자가 고난을 대신 감당해 주신 정도라야 체휼이다. 집 없이 얼어 죽어 가는 이에게 내 집을 내어 주고 “나는 얼어 죽어도 너는 살아라” 해야 체휼이다. 주님처럼 우리 마음과 모든 처지를 만져 주실 분은 없다. 지금 당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혀를 끌끌 차고 눈물을 흘린다 한들 그에게 무슨 소용인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3:8).
베드로는 ‘마음을 같이하는 것’, 즉 체휼을 반복어법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체휼의 또 하나의 영어 번역은 understand(언더스탠드, 이해하다)다. under(아래에) + stand(서다, 자리 잡다), 즉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내가 낮아져야만 남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이 불쌍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하고 모질게 끔찍한 일들을 겪으신 것도 낮아져 섬기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형제를 미워하고 교만하다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긍휼 없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약2:13)만 있을 뿐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53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