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12] 코람 데오(Coram Deo), 늘 하나님 앞에서

등록날짜 [ 2017-11-21 13:31:55 ]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는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20:3)다. 그런데 인류는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한다. 왜 그런가?

첫째, 인류는 죄를 지어 마귀에게 속했고 마귀의 습성을 따라 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반역한, 타락한 천사다. 마귀의 속성 자체가 경배받고, 자신이 주인 되려는 것이다.

둘째,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 즉 정욕 때문이다. 인류학(anthropology)은 우상 만들기(idolization) 바탕에 내재한 인간의 욕구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정당화’ ‘양심의 가책을 마비시키는 메커니즘’이라고 본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영적 존재’, 곧 ‘생령(生靈)’이 된 존재다(창2:7).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고, ‘양심’이 있다. 하나님 면전에서 죄지을 ‘간 큰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인류는 하나님을 송아지 모양의 금덩어리나 온갖 짐승·벌레·식물 같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한정하고, 자신의 양심을 그것에 가뒀다. 그러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마음껏 정욕을 추구한다. 과거에 이방종교의 신전이 대부분 매음굴이요, 사제들은 매춘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 주인 되어 제멋대로 하려는 죄성(罪性)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여전히 못 박아 두는 것과 관련 깊다. 루터의 신앙개혁 이후 기독교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우상단지 섬기듯 매달아 놓은 ‘예수가 못 박혀 있는 십자가 상’을 없앴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있는 예수가 아니다. 죄 없으신 증거로 장사(葬事)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모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다(롬14:9). 우리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Deo) 면전에서(Coram)’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산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타락한 면모가 엿보여 안타깝다. 믿노라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 되어 살고, 기도하여 주님을 일하시게 하기보다 자기 지식과 능력을 과시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런 자는 음부권세의 앞잡이일 뿐이다. 부활의 증인 되었던 초대교회(행1:22;4:33)와 달리 요즘 교회는 ‘부활 주일 딱 하루’만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부활 찬송도 몇 곡 없다. 예수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인이 되시면 내가 주인 자리에서 내려와 ‘코람 데오’로 살아야 하는데 이를 싫어하고 불편하게 느끼게 하는 존재가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은혜받은 것 같아도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코람 데오’는 예수의 십자가마저 우상으로 만드는 마귀 궤계에 대한 항거요, 신앙인이 가져야 할 참된 정신이자 행동양식이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시는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게 된다. 옛 습성이 안 고쳐진다.  프랑스의 ‘위그노(개신교 신자)’들은 이 코람 데오 정신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았다”(골3:23). 그들의 경쟁력을 당할 자가 없었다. 그들이 오늘날 프랑스 빵, 스위스 시계, 독일 자동차를 있게 한 장본인들이다. 왜 우리는 경쟁력을 잃고 세상 탓하며 사는가? 근본적으로 우리 또한 예수를 여전히 죽이고 욕보이는 자가 아닌가?






위 글은 교회신문 <55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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