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8-03-30 13:49:06 ]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주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시자 미치도록 기뻤다. 그러나 주님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신다. 불안하다. 사라져 계신 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베드로같이 어부 출신 제자들은 “예전처럼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 할 정도로 갈팡질팡한다(요21:3). 그런데 그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을 감람산에 모아 놓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1:4~5).
변덕스러운 제자들의 인내심이 또 바닥날까 봐 “몇 날이 못 되어”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주님의 약속은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준다”는 그 약속이었다(요16:7). 제자들은 주님이 승천하시자 헤어진 아픔에 그저 멍하니 하늘만 봤다. 그러나 약속대로 성령께서 오셨다. 예전 같으면 주님을 따르는 허다한 인파 때문에, 혹은 주님이 혼자 기도하고 계셔서 긴히 아뢸 말씀이 있어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은 성령으로 24시간 내 안에 계신다.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
초대교회는 내 몸을 전(殿) 삼으신 성령께서 어찌하면 나로 인해 기뻐하시고, 나를 주장하시게 할지가 초점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기도와 말씀에 전혀 힘썼다. 성령과 교제하는 일을 미룰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류를 사랑하시기에 우주보다 크신 이가 피 흘려 죽는 사람의 육신으로 오셨는지 그 깊은 진심을 알려 주시니, 늘 울어도 그 사랑 갚을 길이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교회는 성령의 인격성을 중시하지 않는다. ‘내가’ 권능을 받아서 ‘내가’ 사역했고, ‘내가’ 병 고쳤고, ‘내가’ 깨달아서 그런지 ‘내’가 너무 많다. 우리 주님을 광야로 몰아내셔서 금식하게 하신 분(막1:12), 예수님이 말씀하실 것을 알려 주신 분(요12:49)은 모두 성령이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죽을 우리 몸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첫 부활에 참여케 하신다(롬8:11). 인격이신 성령님을 모셔 들이는 것은 ‘불 받는’ 것도 ‘바람을 따르는’ 것도 아닌데, 곡해(曲解)해서 성령님을 무생물로 취급할 때가 많다. 성령 충만을 내 느낌이나 감정, 혹은 내 몸의 현상으로 국한한다. ‘내’가 그렇게 여전히 주인 행세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내게서 발휘할 ‘권능’의 꿈이 주님보다 더 크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4: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여기서 ‘시기하다(φθόνος, 프흐도노스)’는 실제로 배우자나 연인이 상대방의 외도를 발견할 때의 ‘감정 상태’를 뜻한다. 그 감정 상태를 잘 설명해 주고자 세상과 벗됨을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라고 앞 절에서 말씀하셨다. 또 성령의 ‘근심(λυπέω, 뤼페오)’은 희랍 외과의사의 의학적 표현이다. 전신의 뼈마디가 부러진 채로 움직일 때 따르는 고통만큼 강한 슬픔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여기서 ‘탄식’(στεναγμοῖς; 스테낙모스)은 너무 힘들어 ‘악’ 소리조차 못 내고, 그저 ‘헉’ 하며 깊은 한숨만 내쉬는 현상이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더 아프시다. 그래서 그분이 친히 간구해 주시는데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위 글은 교회신문 <56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