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32] 경험으로 하나님을 아는(기노스코 γινώσκω) 지식

등록날짜 [ 2018-08-28 13:37:13 ]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무엇일까? 단연코 “알았어(I know)”다. 아내와 부모에게 훈계를 듣기 싫을 때 이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만일 외국 영화에서 아내가 심하게 잔소리를 하는 장면에서 남편이 “I know”라고 한다면 자막을 어떻게 달아야 할까? “그만!” 혹은 “내가 알아서 할게!”가 상황에 맞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천사가 예수를 잉태할 것을 고지할 때, 마리아가 한 말이다. 여기서  ‘알다,  γινώσκω(기노스코)’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할 때, 또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고 할 때 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여대생이 같은 과(科) 남학생과 강의실에 함께 갔는데, 나중에 누군가가 “그때, 그 남자 누구야?”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He is my male friend(절대 boy friend라 하지 않아야 함)”라고 대답할 테고 우리말로는 “그냥 남자 사람 친구야”다. 더 간편한 말은 “He is just an acquaintance”, 곧 “그냥 아는 사람이야”라고 하면 된다. acquaintace(어퀘인턴스)는 ‘지식을 습득하다’는  acquire(어콰이어)에서 파생한 단어로 ‘그냥 아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동정녀 마리아가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때의 앎, γινώσκω(기노스코)는 ▲부부가 경험으로 아는 것(experience) 또는 어미가 해산하는 수고와 육아 경험으로 자식을 아는 것을 뜻한다. 또 ▲자신과 하나로 동일시함(identify), ▲이론이나 생각 단계가 아니라 실체화함(realize)을 뜻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여기에서 ‘알다’도 γινώσκω(기노스코)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요17:21)라는 말씀으로 반복되는데 곧 ‘하나가 되는(identify)’ 앎을 뜻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identity)을 소유함을 말한다. 자신이 한국인임을 안다는 사실은 내가 ‘한국’에 속한 자라는 뜻, 곧 한국인이라는 정체성(identity)을 소유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내가 천국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함(identify), 곧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아시기에’ 대신 죽고 우리의 주인을 마귀에서 바꿔 주려고 부활하셨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주님은 “왜 내 사람들을 핍박하느냐” 대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주님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가 부끄럽고, 복음이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나라 축구팀이 오심(誤審) 탓에 경기에 진 것만큼도 분한 감정이 없다면 예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γνώσεως Χριστός; 기노세우스 크리스토스)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수준의 앎이며, 이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 곧 현실에서 관찰될 만한 것이라 했다(빌3:8~9).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한 몸 된 ‘앎’이 아니라 그냥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예수의 부활과 살아 계심을 실제로 아느냐고 외칠 때 “저도 알아요(I know)”라고 한다면 “설교를 빨리 끝내 주세요”라는 뜻이다. 그분의 사랑을 정말 ‘안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를 읽다가도 ‘이처럼’이라는 단 세 글자에 들어 있는, 아들 죽인 그 사랑 때문에 눈물을 주체 못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58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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