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1-03 00:21:46 ]
십자가에는 예수 그리스도만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 오시기 오래전부터 십자가는 고문과 죽임이 동시에 집행되는 가장 잔인한 극형이었다. 교차한 나무에 묶고 손목과 발에 못을 박아 매달면서 벌거벗겨 노출된 피부 곳곳에 상처를 낸 상태에서 죽을 때까지 시간을 최대한 끌고 고통을 주는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에 이르러 그 매뉴얼이 정확히 만들어졌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갖는다. 이미 주전(主前, B.C.) 479년에 아테네의 포로가 된 페르시아 장군을 십자가형에 처했다는 기록을 당시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가 남겼듯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는 매우 많다.
예수님이 죽을 당시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는 3개였는데, 예수 십자가가 가운데 것이라서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 이전에도 ‘드다(Theudas)’처럼 반(反)로마 혁명을 선동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행5:36), 로마 역사에도 등장하는 많은 십자가형 기록 중에서 왜 하필 나사렛 예수만 구원에 이르는 십자가인가? 그것은 신약 성경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15:3). 여기서 ‘성경대로’는 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카타 타스 그라파스, according to the Scripture)로 “성경의 예언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만일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를 남대문시장에서 처음 만난다고 하자. 만나기로 한 그 사람을 “검은 머리에 키가 170㎝쯤 되는 남자”라고 하면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저는 초록색 머플러를 두르고 분홍색 셔츠와 빨간 외투, 보라색 바지에 노란 구두를 신고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틀릴 리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전 1513년 기록부터 443년까지 출생지, 계보와 성장·주거 지역, 동선(動線)과 인상착의, 어떻게 죽으시고 죽어도 썩지 않으실 것까지가 다 나와 있고 하나도 빠지지 않고 실행됐다. 신약성경 제일 첫 장부터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의 계보를 지루하게 나열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그토록 오랜 애쓰심을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요19:30) 하심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엉뚱한 사람 붙들지 말라고.
결정적으로 예수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흉내가 안 된다. 부활한 이단교주를 보았나?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4). 주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이날을 주인(主人) 되신 ‘주일(主日)’로 바꾸셨다. 한국식으로 ‘사흘 만에라 하면 월요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거래계약서와 같은 정밀한 법적 의미다. 가령 주식매매 거래가 ‘3일 결제’라고 하면 월요일에 매매가 발생하면 수요일에 돈과 주식의 교환이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법정계약서는 그래서 날짜와 용어가 정의된 문서, 곧 ‘term sheet(텀시트, 거래조건서류)’가 있어야 한다. 거래당일이 ‘Day 1’이 되고 ‘Day 3’에 결제(settlement)가 완성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사흘 있던 것처럼, 성전을 헐어도 제삼 일에 다시 완성하신다는 말씀대로, 정확히 제삼 일에(on day 3) 성경대로 부활하셨다.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 다음에, 그리고 바울 이전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다(고전15:7).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5)라고 기록될 때의 그 야고보는 자신의 경험, 생각과 외모만 보고 자기 형이 미쳤다며 강제로 끌어내려고도 했다(막3:21).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바울과 다른 사도들처럼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사실이 보이자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리고 순교 직전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0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