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1-17 01:36:13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원문에 λόγος(로고스, Logos)라고 기록돼 있다. 로고스는 체계나 논리, 혹은 일관성 없는 잡다한 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의지’(志;목적, 뜻)와 ‘지식’(知)의 원천이자 우연이 아닌 체계로 모든 만물을 운행하는 근원을 뜻한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이 다양한 생각(idea, 아이디어)을 하지만, ‘생각’ 자체는 단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들이 나름대로 이성적 체계화를 갖추고 사람의 행동양식, 체제, 문화까지도 바꾸는 능력이 생기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ideology)’가 된다. 곧 ‘생각이 영향력을 갖춘 체계적 지식체계’ 즉 이데올로기(ideology, idea+logy)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로고스(logos)나 여기서 파생된 말(logue)이라는 의미는 체계적이며 살아 있어 운동력 있는 요소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말씀(Logos)이신 하나님이라 할 때, 그 말씀은 자체가 모든 만물에 대한 능력이며 정확한 뜻이며 반드시 이루는 의지며 약속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히4:12) 이유는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 명문장이고 수사학적으로 정교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그 말씀으로 창조됐고 만물이 그 말씀을 들을 귀가 있어 순종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생각과 뜻과 의지로 내 행동과 환경을 변화시키려 하고,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생령(生靈)이어서 그분의 인격을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 이성적이기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시는 말씀 대부분이 분명한 약속이 있는 조건문 명제 형태인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명제는 결과가 있는 조건문 형태이며 보편적인 형식은 ‘A이면 B이다’(A→B)인데 명제 자체가 ‘참’인지 ‘거짓’인지의 진릿값을 가진다. 명제는 역(B→A; B이면 A다)과 부정명제(~A→~B; A가 아니면 B가 아니다)와 대우명제(~B →~A; B가 아니면 A가 아니다)로 파생된다. 가령 ‘A→B’가 참(true)이라면 ‘B→A’, 곧 ‘역명제’도 참인가? 반드시 그렇진 않다. 예를 들어, ‘12의 약수는 24의 약수이기도 하다’는 참이지만, 역으로 ‘24의 약수는 12의 약수이기도 하다’는 모두 참은 아니다. 그런데 명제의 파생에서 ‘반드시’ 진리값이 같은 관계가 있다. ‘A→B’와 ‘~B→~A’가 그것이다. 즉 명제가 참이면, 대우명제도 반드시 참이다.
그러므로 각자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미약하게 시작했을지라도 약속을 이룰 능력이 있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대우명제로 풀어서 다시 되새겨 보는 것도 믿음을 성장시키는 방법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는 명제가 진리라면, 우리가 응답받지 못함은(~B), 믿음으로 구하지 않아서인 것이다(~A).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요11:40) 말씀처럼 우리가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 능력을 늘 경험하지 못했다면 믿지 않아서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의 말씀처럼 권능을 받지 못함은 성령께서 내게 임하도록 나를 내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로 인격적으로 좀 거칠거나 신학적 지식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능력이 나타나는 까닭도 그 능력이 개인의 인격이나 경건에 있지 않고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능력이 발동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도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없음을 늘 회개하고 믿음과 믿는 자에게 따른다고 약속하신 말씀의 능력을 구하여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60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