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3-26 15:14:48 ]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죄의식을 느끼면서 자기 양심이 증거가 돼(롬2:15) 아파한다. 이 양심은 하나님 형상의 모양으로 창조된 이에게 부여된 본능이다. 마치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정신세계는 문학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4~25).
이방인에게는 양심,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꿈 몽(夢)자, 가르칠 학(學)자를 써서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고 했다. 꿈속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 꿈에도 나타나 힘들게 하는 존재인 ‘몽학선생’은 헬라어로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ός)로, 페다고지(pedagogy, 교육학)란 단어의 어원이다. 영어성경(KJV)은 이 단어를 스쿨마스터(schoolmaster), 곧 단순히 가르치는 정도가 아니라 출입 일체를 허락받아야만 하는 마치 간수 같은 ‘사감선생’ 또는 훈육감으로 번역했다. 본래 파이다고고스는 주인에게서 주인과 동등한 권한을 위임받아 주인의 아들을 혹독하게 훈육하는 교사노예를 뜻하며 출입통제권을 가졌다. 만일 어설프고 원칙에 어긋나게 대했다가는 자기 목도 잃을 수 있는 긴장된 직책이다.
곧 ‘몽학선생’은 감시하며 가차 없이 벌을 주는, 존재만으로도 공포다. 용서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곧 몽학선생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혜를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부르는, 두려운 신이 현실화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 대신 죽어 사랑을 확증하신 그리스도(롬5:8)를 만나 그 사랑에 무너지고 회개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요8:32) 한없는 기쁨을 경험한다. 성령 충만해 그 사랑을 알수록 두려움 속에서 죄로 갈등하던 몽학선생의 제자 신분에서 벗어난다. 성장하면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인 나에게 종일뿐이다. 이제는 무서워서 온갖 세부적인 통제를 따라야 했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마22:37~40)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완성한다.
그리스도로 어린아이를 벗어난 자는 모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산다(롬14:9). 모든 것이 가하며 아무에게도 제재를 받지 아니하니(고전6:12),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유익한 것을 좇는 삶을 살며 비록 실수할지라도 다시 일어설 담력을 얻는다. 그것이 우리가 소유한 복음의 진리요, 자유다.
위 글은 교회신문 <61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