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6-10 11:45:02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주님은 외치셨다. 그때 주님이 뜻하신 ‘위로’는 무엇이었을까. 따뜻한 말? 부유(富裕)? 상상하건대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일 게 분명하다. 주님은 “악한 자라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늘 하물며 천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하셨다. 최고의 위로는 회개하여 애통할 때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심”(요일4:13)으로 누리는 안위(comfort)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는 ‘성령’ 대신 ‘좋은 것’이라고 기록했는데, 굳이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내주(內住)하시는 성령님께서 질그릇인 내 안에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를 증거하시고, 예수를 증거하게 하시고,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시고,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려 주시고,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그 영이 죽을 나의 몸도 다시 살리실(롬8:11) 것이므로, 천 번을 뽑아도 ‘성령’이다.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와 저지른 범죄가 드러나자 “내 안의 정직한 영(spirit)을 새롭게 하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broken spirit; 의역하자면 통회하는 영)입니다”(시편51편)라고 고백했다.
‘애통하다’의 헬라어 πενθέω(펜테오)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만큼 흐느끼거나 우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격한 슬픔의 통곡”이라는 뜻이다. 분명 마가 다락방은 애통의 도가니였을 터다. 자기 살자고 예수 부인하던 베드로, 혁명에 성공하면 한자리 차지하게 해 달라고 싸움박질하던 제자들, 주님은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잠만 자던 제자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도망친 나, 손과 옆구리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 봐야 예수 부활을 믿겠다고 말한 도마, 교회 안에서 영향력 다툼하는 직분자들, 형제를 판단하고 혓바닥 놀리는 나, 그렇게 시작된 회개는 결국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잡아 끄집어 당기면 나머지 죄들은 넝쿨째 끌려 나오는 뿌리 죄. 내가 마귀보다 더 악랄한 죄인이라는 것이 티끌만큼도 과장이 아님을 꼼짝 못 하게 증명할 그 ‘죄’가 드러난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주님은 마귀를 위해서는 어떠한 구원의 계획도 주신 적이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는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런데도 정말 예수 믿는다면서 그렇게 비겁할 수는 없을 테니, 성령이여, 정직한 영으로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케 하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62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