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12-09 13:52:06 ]
프랑스혁명의 주역 로베스피에르가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 요즘으로 치면 ‘적폐 청산’이라는 명목하에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斷頭臺)에 보낼 때 긍휼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과거 체제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거나,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반혁명 세력으로 몰아 무거운 칼날로 목을 내리쳤다.
비판과 참소는 할수록 중독성이 커지는 특성을 가져 루이 16세 처형 이후 1만7천 명을 단두대로 보냈다. 급기야 로베스피에르 자신의 혁명 동지 당통, 유일한 친구 카미유 데스물랭과 그의 부인 루실까지도 그의 참소에 죽임당했다. 참소자에게 평안이 있을까? 실제로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 중에 불면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렸고, 마침내 자신도 혁명위원회에 체포돼 “자기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판단을 받아” 콩코드 광장에서 목이 잘렸다.
성경은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 하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 우리 형제들을 밤낮 참소하던 자”(계12:10)라고 한다. 여기서 ‘참소자’는 헬라어로 κατήγορος(카타이고로스)인데 ‘적대(敵對)’라는 뜻의 헬라어 어두 ‘kata-’(anti)와 ‘의회’라는 헬라어 ‘agora’(assembly)의 합성어다. 참소자란 곧 ‘적대조직’인데 마치 검찰처럼 많은 검·경 조직을 부려 집요하고 혹독하게 물고 늘어져 죄를 정하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지게 할 만큼 강력해서 믿음의 방패 없이는 못 버틴다.
교회 안에도 로베스피에르 같은 자, 음부 권세의 앞잡이인 불행한 자가 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요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는데, 그 힘은 지옥에서 온 것이다(약3:6).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 지적과 비판으로 상대가 바뀐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중보기도는 하지 않는다. 둘째, 자신도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주님이 보여 주셔도 양심이 어두워 자기 들보를 보지 못한다.
불행히도 자신의 이 같은 ‘까칠함’과 ‘분노’에는 ‘대의명분’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막상 주님 관계는 삭막하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는 말씀대로 주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판 중독에 물들수록 자신도 마귀 참소에 빠져 평안이 깨진다. 혹여 자신이 비판한 올무 그대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고, 외식하다 결국엔 양심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른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도 덮고 두려움을 내어 쫓으나,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요일4:18).
위 글은 교회신문 <65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