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5-02 10:34:52 ]
“먹는 게 남는 거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 사실 이런 말들은 좋은 경험을 아무리 많이 해 봐도 결국 거기서 거기고, 좋은 날의 기억도 결국 희미해지고 사진만이 퇴색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허무적 표현이다.
시간(時間)의 대부분은 기계적·습관적으로 잡념과 무신경 속에서 ‘시간 때우기’ 식으로 지나간다. 그래서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똑같이 나이를 먹는 세월을 지나도 그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참된 시간’을 얼마나 사용했느냐에 따라 존재의 무게가 달라진다고 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수많은 강의·만남·여행 중에서 떠올려 보라. 당신 인생의 결정적인 존재로 기억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참으로 미미할 것이다.
그 때문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세상의 허무를 깨닫는 지혜를 얻으면, 쓸데없는 일에는 저절로 재갈을 물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말은 많고 지식은 넘쳐도 몸만 피곤하고 시간만 낭비한 거다.
기원후 1세기 당대 석학인 유대인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몇 안 되는 문하생 사도 바울이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행17:16) 당시 그리스 철학 양대 산맥인 ‘에피쿠로스(에비구레오)’파(派)와 ‘스토아(스도이고)’파 철학자들과 쟁론할 때, 바울의 전도는 단순했다.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17:18).
성경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예수와 그 부활 복음”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이 저들 철학의 모순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요, 바울이 저들보다 배움이 짧아서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기 때문’(행17:31)이다.
당시 플라톤의 영향 아래 있던 저들에게 예수 부활이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곧바로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행17:18) 하면서 ‘말장이’(성경 원문에 σπερμολόγος 스페르몰로고스), ‘까마귀처럼 잡다한 걸 주워 먹는 자’ 즉 잡다한 지식을 주워 생각 없이 말하는 자라고 비아냥댄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고후4:5)이 바울이 전한 평생 설교 주제다. 다른 건 없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빌3:10)하는 것 외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바울은 알기에 그 밖에는 “배설물”(빌3:8)이라 했고, 쓸데없는 자기 지식이나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주여! 내가 주저리주저리 떠든 잡다한 말은 다 쓸데없고 남는 것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온전히 알고 살아가게 하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67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