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6-13 10:22:03 ]
미국 필라델피아에 사는 의사 B씨는 할렘 지역에서 가난한 흑인과 빈민층을 위해 수익 목적이 아닌 진료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가진 분인데 어느 날 의료소송을 당했다. 툭하면 찾아와서 친해진 분의 아이가 경미한 증상을 보여 “별것 아니야” 하고 돌려보낸 것을 ‘환자당 최소진료시간을 지키지 않은 차별’이라고 변호사와 결탁해 거액의 위자료 소송을 걸어왔다. 그때 B씨는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느냐?”고 하소연했지만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부모로서 나름 최선을 다해 자녀를 키웠어도 정도의 차이만 있지 부모 노릇 잘 못한 미안함이나 후회가 없는 이는 없다. 그와 동시에 자식에게 일생의 수고가 백지장처럼 판단받고 도리어 섭섭함의 표적이 될 때의 속상함을 안고 살지 않는 부모도 없을 터. 사람의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내 영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마음을 풀어헤치고 속상함을 토로해 본 이는 이런 성령의 음성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는 너는 나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해 보았니? 네가 얼마나 나를 망각하고 만홀히 여기며 살아왔는지 내 마음을 알겠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12:3). 육의 사람이 정욕대로 살다 좌절하는 것을 ‘낙심’이라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낙심’은 최소한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해당한다.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사람들은 배은망덕하고 배신하고 친절 요구를 권리로 여기는 뻔뻔함에 영혼은 서서히 고갈되어 간다.
성경 원문은 그 과정을 두 단계로 설명했다. 1단계는 ‘피곤하여’(κάμητε ταῖς ψυχαῖς; 카메테 타이스 시카이스)의 상태다. 영어로 직역하면 ‘weary of soul’, 곧 영혼이 닳아 가는, 영혼이 고갈되는 단계다. 결국 2단계로 넘어가면 반딧불이 사그라지듯 꺼져 버리고 만다. ‘낙심’(ἐκλυόμενοι; 에클리오메노이)은 영어로 faint, 곧 불빛이 희미해져 없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 예수님만 바라봐야 견딜 수 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줬는데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죽이려 들고(요5:16),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했더니 더 큰 이적과 혁명(革命)을 바라며 성에 안 찬다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인간들이 우리다. 애굽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해방되었으나 조금만 힘들면 불평불만을 달고 사는 인생. 생명과 자유를 줄 뿐 아니라 사막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 물, 만나, 고기, 의복 등 모든 것을 더하시는데도 끝없이 배신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나’를 발견해야 한다. 그런 나를 참으신 주님 앞에 날마다 서는 것만이 피곤하여 낙심에 빠짐을 이길 방법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