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3-29 16:22:47 ]
최고의 암살자들은 암살당하는 사람이 킬러에게 살해당하는 것조차 드러나지 않도록 자연사나 사고사로 보이도록 위장한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이런 일들이 영적세계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상이다.
영적존재인 마귀는 사람들 사이에서 증오와 분노를 일으키거나 염려를 주어 각자에게 파멸의 씨앗을 심어둔다. 분노, 미움 그리고 걱정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감정이지만, 마귀는 이를 일시적으로 넘겨버리지 못하고 오래도록 간직하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씨앗들이 자라 마음껏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는(요10:10) 마귀에게 지배받는 상태에 이르고, 그 결과 우리 주변에서 관계의 파괴, 반목, 원망, 저주와 복수, 폭력과 중독, 가난과 질병, 불행한 사고들을 보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라고 하셨다. 또 성령을 통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고 당부하셨고, 그러지 않으면 “마귀로 틈을 타게”(엡4:27)된다고 알려주셨다. 용서해야 할 대상이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용서하지 못한 채 밤을 넘기고 급기야 마귀로 틈을 타게 되면 어느 순간 올무에 걸린 상태가 된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잠22:24~25). 올무는 원어로 ‘מוֹקֵש(모케쉬=snare, 구덩이함정=mine)이고 구약시대 사냥 도구나 사냥 방식의 이름이다. 올무와 구덩이함정은 일단 한번 목에 걸리거나 빠지면 강력한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발버둥 칠수록 더욱 목을 조이고 죽음에 다다르게 하는 장치다.
이 위험성을 잘 아는 영을 분별하는 사람들은 분노를 유발하는 문화도 걸러버리고 합당한 집회나 시위를 하더라도 분노를 부르는 싸움과는 거리를 둔다. 히브리서 12장 14~15절에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지 않으면 주를 볼 수 없으며 그러지 못하고 분을 뿌리는 자를 ‘쓴 뿌리’가 된다고 경고하셨다.
여기서 ‘쓴 뿌리’는 원어로 ‘πικρία(피크리아=bitterness)이고 ‘쓴 열매를 맺게 만드는 뿌리’를 뜻한다. 헬라어로 이 ‘쓰다’는 의미 자체가 ‘분노’의 은유적 표현이다. 이 파멸의 메커니즘(궤계)의 희생자가 되지 말라고 주님은 주의 기도에도 이렇게 많은 문장을 할애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악한 자; 마귀)에서 구하옵소서”(마6:12~13).
교회 안에서도 ‘거룩한 분노’라며 성을 내는 것과 비판하는 것과, 성을 내는 방식의 대화를 정당화 하는 쓴 뿌리들을 제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야1:20).
위 글은 교회신문 <69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