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84] 주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며

등록날짜 [ 2021-05-12 12:24:14 ]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심을 알고 의지하는 자라면 당연히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 어린 아기가 젖을 달라고 “응애” 하고 울듯, 하물며 불의한 재판관에게도 지겨울 정도로 민원을 넣는 과부도 있는데 의롭고 전능하시며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주셔서 사랑을 확증하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약속까지 주셨는데, 주님께 구하지 않는다면 은혜 베푸신 이를 욕보이는 일이다. 도리어 ‘기복신앙’이 아닐까 하면서 주저하다 기도하지 않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기복신앙인가 아닌가는 내가 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주님과 나의 관계가 더 소중한가 ▲응답의 결과가 더 소중한가라는 중심의 차이다. 지금 당신에게 소원을 이뤄 주는 마법램프가 생겨서 수천조 원의 재산과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이 생겼다고 하자. 아무리 많은 아첨꾼과 거짓 사랑에 둘러싸여 매일 호사스러운 연회와 사치 속에 살며 육신으로는 아무 부족함이 없더라도, 당신의 자녀는 삐뚤어져 지옥 자식이 되고, 배우자와 원수지간이 되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침묵을 경험할 때, 그 고독과 공포가 어떤 것인지 아는 이의 복을 구함은 기복신앙이 아니다.


그래서 다윗이 밧세바와 범한 죄가 드러났을 때 빌었던 말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였다. 여기에서 ‘주 앞에서’의 원문 ‘מלפניך(유포네하; in front of your face, 당신의 얼굴 앞에서)’는 추상적 기도가 아니다. 지금까지 온갖 역경에도 함께하신 그분,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다윗의 공포를 절절히 드러낸다. 다윗이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 같은 삶이 가능했던 것도 성령이 임재하셨기 때문임을 잘 알기에 제발 성령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다.


기도 응답을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응답이 늦는 힘듦보다 주님과의 관계 걱정이 상사병만큼이나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혹여 내가 주님 앞에 무슨 막힘이 있어 쫓겨난 것은 아닌가’라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에서 ‘소멸하다’로 쓰인 ‘σβέννυμι(스벤누미)’는 ‘(불을) 끄다, 질식시키다, 분리시키다’라는 의미다. 어떤 행동이 성령을 이렇게 억누르며 다윗을 그토록 떨게 한 결과를 초래할까. 그 앞의 구절을 보면 항상 기도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나온다(살전5:16~18).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40년간 만나를 먹고 나왔는데도 에돔 땅을 가로질러 가나안으로 바로 가지 못하자 “마음이 상했다”(민21:4)고 했다. 곧이어 나오는 반응이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음식을 싫어하노라”(민21:5)였듯 주님과의 관계보다 보이는 결과에만 집착하면 그 엄청난 만나가 하루아침에 ‘박한(하찮은) 음식’이 된다. 기복신앙이 아닌 구함은 응답의 경중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응답을 뛸 듯이 기뻐한다. ‘주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기억하심’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항상 하나님의 복 가운데 있어도 이를 모른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6).



위 글은 교회신문 <69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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