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86]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περπερεύομαι (페르페류오마이)

등록날짜 [ 2021-06-09 16:26:43 ]

우리 모두는 평범한 존재이기를 거부하도록 지어졌다. 그래서 아기 때부터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의 관심을 끌려고 ‘퇴행현상’을 보이기도 하고,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 받으려고 열심히 숙제를 하고, 조그마한 상이라도 받으면 동네방네 자랑하며 자라 왔다. 그리고 성장한 후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욕구가 성숙해지면서 ‘인정욕구’ 역시 타인으로부터 얻는 찬사보다는 내적인 자기실현(self-esteem)에 무게중심을 둔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은 우리가 무게중심을 잘 잡도록 내버려 둘 리 없다. 여전히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습관적으로 과장과 거짓도 불사하거나, 그 반대로 존재감 없는 상처의 누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문제를 끝없이 일으키는 양극을 두고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멋진 연출이 가능한 SNS도 남의 주목을 받아 보려는 수단으로 한몫을 톡톡히 한다.


인정받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본능이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인정욕구에 잡혀 있다면 성장하지 못한다. 그렇게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서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기록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특성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4절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 원문의 ‘περπερεύομαι(페르페류오마이, 자랑하다)는 허풍선을 뜻하는 헬라어 어원 ‘페르페르’에서 나왔다. 자기 자랑이 많은 자는 성령의 양심으로 비추었을 때 반드시 자랑하고자 하는 본심이 걸리는데, 그 표현방식에서 반드시 ‘치장(window dressing)’이나, 전문 용어로 구사하는 본인조차 인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교묘한 ‘수사학(rhetoric)’이 수반된다.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쓰인 ‘교만하다’는 뜻을 가진 ‘φυσιόω(푸시오)’는 원래 어원의 뜻이 ‘방광(φυσαλλίς, 푸살리스)’이다. “오줌보가 부풀듯 과장한 것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긍지로 삼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면서 자랑은 버린다. 육체나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고(고전1:29, 3:21), 자랑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 전염된다(고전5:6). 자랑하려거든 남에게 말고 주님과 사이에서 자기에게만 하면 된다(갈6:4).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갈6:14)을 아는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사복음서의 저자, 특히 사도 요한조차 사도로서 자기 이름조차 끝까지 기표되지 않게 고심한 흔적과 오늘날은 사뭇 다르다.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습3:11).




위 글은 교회신문 <70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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