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7-06 07:16:55 ]
당신이 소유한 포르쉐를 잠깐 세웠다가 도난당해 버렸다고 가정하자. 그렇지만 당신 차고에 각종 브랜드의 고급차 백여 대가 있고, 당신 재산에 비해 포르쉐가 자판기 커피 한 잔 값도 안 된다면 별로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그 자동차라면 어떻겠는가? 당신이 처박힌 귀걸이의 한쪽이거나 소각 처리를 앞둔 낡은 책상이라면 정말 괜찮겠는가? 제3자는 “다른 대체물로 당신을 바꿔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그게 이성적인 사고”라고 결론지을지 몰라도 자신이 그 폐기물이라면 정말 상관없을까?
세상의 사고체계는 부족, 지역, 국가, 회사, 조직에서 개개인이 담당할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을 잘해 내지 못하면 존재가치도 없다고 조건반사를 일으키게끔 유아 때부터 끝없이 학습시킨다. 제대로 못 하면 대체될 수 있음에 대한 암시, 잘하면 받는 보상을 받는 채찍과 당근 시스템이 어느 사회나 존재해 만인이 이 체제에 종노릇하게 한다. 확실히 이 시스템은 효율성을 높인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사고체계 아래에서 종이 된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마18:12)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냐고. 그렇게 찾으면 그 찾은 하나 때문에 잔치를 벌인다고. 다시 찾은 하나가 지금 가진 아흔아홉보다 기쁘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의 질문에서 ‘생각’이란 단어의 ‘δοκέω(도케오; to seem, to accept, cognate)’는 세상 사고체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세상에서 교육받은 이들은 필경 “그 한 마리 때문에 위협받을 99마리의 안전은 어찌되느냐”는 공리주의적 의심도 했을 테고, “작은 양 한 마리 찾고 잔치할 때 어차피 양 잡지 않을 거임?” 같은 기능주의적 반론도 논리적이다.
부활을 들어도 모르고 결국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깨치기 원했던 주님 심정은 ‘네가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이라는 그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무엇을 잘하고 못 하는지 ‘기능’으로 보고 대체 가능한 ‘숫자’로 여기기도 한다. 나 하나 없어도 대체할 99, 일천, 일만, 일억이 있다면 보고거리도 안 될 수 있지만 주님은 나를 ‘생명’으로 보시고 ‘존재’로 보시고 내가 진토임을 아시고, 내가 식물인간일지라도 다른 누구와 나를 바꾸는 것으로 만족하실 분이 아니시다.
내 ‘생명’은 다른 어떤 것과 저울질되지 않는다. 그 기능의 차이로 중요함의 경중을 재는 생각의 체계를 바꾸라. 그것이 주님 심정, 주의 마음, 한 사람도 놓치지 않는 예수님의 뜻이다. 그래서 이 말씀 앞에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마18:10)고 당부하신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전문가들이 경영학 기법에 따라 움직인다면 성령은 제한당하신다. 나는 잡아먹히기 위해 사육된 양이 아니라 주님이 목숨 바쳐 누구와 비교하지도, 바꾸지도 않는 생명이란 사랑이 나를 무너뜨린다.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으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삼하12:3).
위 글은 교회신문 <70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