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7-19 19:27:03 ]
보통 사람에게 폭 50㎝, 길이 10m 정도의 널빤지 위를 지나가라고 하면 아주 쉽게 통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 널빤지를 약 50미터 상공의 건물 사이에 걸쳐 놓고 건너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널빤지가 아무리 튼튼하고, 바람도 없어 흔들리지 않더라도 무척 어려울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정신을 멍하게 하고 근육을 뻣뻣하게 경직시킨다. 평지에서라면 한 발로도 뛰어갈 수 있을 텐데 이토록 어려워지는 차이는 ‘공포’다.
사람의 이 연약한 특성을 마귀는 잘 알아서 늘 ‘염려하게 만드는 것’ 같은 방법을 쓴다. 갓난아이는 밥 걱정을 하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도 부모가 “밥 먹자!” 하고 부를 때 ‘혹시 식탁에 밥이 없으면 어쩌나’ 같은 염려를 안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각이 생기면서부터 부모, 교사 그리고 세상은 “그러다 굶어 죽어. 그러다 거지 돼. 뭐 해서 먹고살래?”라고 공격하곤 한다. 모든 것을 채우시는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이런 식으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 하는 게 세상이다. 그렇게 공포를 ‘각인’시켜 놓으면 마치 최면술처럼 평소에 쉽게 건널 수 있는 다리도 한 걸음도 못 떼게 만드는 생각의 감옥에 가둘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이렇게도 정의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히2:15). 이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는데, 첫째는 사람의 상태다. ‘삶의 노예’ 상태란 말이다. 여기에서 ‘종노릇’의 ‘δουλεία(두레이아, slave)’는 노예, 노예상태뿐만 아니라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구속을 뜻한다. 그 이유가 일생, 곧 지금의 삶인 ‘ζάωι(자오, real life)’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삶의 노예(salve of life)를 유지하는 방식인데, 그 방법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공포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삶의 염려로 마귀에게 세뇌당하고, 세상의 노예가 된 인생으로는 주님을 뵐 수 없다. “너희는 스르로 조심하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방탕함, 술 취함은 교회 안에서 누구나 아는, 눈에 보이는 적이다.
왜 우리 예수님은 방탕함, 술 취함과 더불어 ‘생활의 염려’를 지적하셨을까. 보이지 않게 스멀스멀 잠식하기에 더 무섭고 전 인생에 걸쳐 한 번도 속박을 깨고 나가 보지도 못하도록 채워 놓은 영적인 결박, 공갈, 세뇌, 가스라이팅이자 어쩌면 한 번도 창조주의 뜻대로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일생의 종, 마귀의 종으로 허무하게 끝장내기 때문이다.
참새보다, 까마귀보다 귀한 우리가 기도할 때 이방인들이 구하는 의식주를 구하는 게 대부분이다. 어느 때는 중차대한 비리의 주모자, 동조자, 방관자로 살면서 애써 그게 순종, 전통, 질서, 가족, 어쩔 수 없는 생계를 위한 일이라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도저히 용기 낼 수 없는 공포 속에 한 걸음도 못 내딛고 질식한다. 마귀가 그 정도밖에 못할 걸 알고 있고 계획대로 타락시킨 현실들이 우리 주변에도 너무나 많다. 정말 아버지를 믿고 천국을 믿는 사람은 공포를 딛고 그 틀에서 나와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
위 글은 교회신문 <70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