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8-03 14:36:29 ]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간에게 공포와 폭력을 근간으로 한 지배만큼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복음의 변질에 목숨을 걸고 개혁을 시작한 루터의 나라. 또 바흐, 베토벤, 브람스 같은 위대한 음악인을 배출한 독일 국민인데 무엇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때처럼 손을 들고 하나 되어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를 외치게 했을까?
그럴듯한 사상만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집단에서 낙인찍기, 거부 못 할 압박감 등 온갖 종류의 메커니즘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나치는 그런 폭력기법을 천재적으로 활용했고 전당대회의 압도적 건물, 서열대로 앉은 제복의 대표자 회의 같은 것도 치밀하게 계산된 메커니즘이며 지금의 포식자들도 놀랍게 동일하다.
모든 제국의 역사가 보여 주듯 공포와 폭력의 지배는 무너지고 만다. 하나님의 천사 하나가 하룻밤에 당대 최고제국 앗수르(앗시리아) 병사 18만5천 명을 송장으로 만들었다(왕하19:35, 사37:36). 창조주 주님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거의 모든 이를 역사 속 제국민처럼 매 주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시에 제복을 입혀 두 손 들고 무릎 꿇려 교회에 대기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지배를 원치 않으신다. 그것이 천국과 제국의 근본적 차이다. 율법 재판을 열어 명예살인이란 이름으로 본보기를 보이고 이교도는 죽이라는 신(神) 따위도 아니다. 처음 이스라엘 민족에게 당신을 드러내실 때부터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34:6)이라고 소개하신 그분이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3~15).
왕따, 괴롭힘, 배신, 이익을 위한 이용, 착취, 음모, 거짓, 허울 좋은 마케팅, 모략, 카리스마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폭력과 굴종이 크든 작든 어디서나 판치는 사회에서 진실한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 하나님께서 제국의 여느 지배자와 같았다면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셨을 터이나 친구는 결코 아니며, 그건 목숨 내어 주신 주님이 원하셨던 바가 아니다. 비록 나 따위의 피조물이지만 겁박해 내 마음을 얻고자 하심이 아니었기에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어도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헬라어로 친구의 원문인 ‘φίλος(필로스)’의 접두어 φίλ(필)은 오늘날 라틴어 Phil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랑(love)’이라는 뜻이다. 오케스트라들 이름이 대부분 필하모닉(Philharmonic)인 것도 사랑(Phil)+화음(harmony)에서 유래한다. ‘φίλος(필로스), 즉 Philos는 ‘사랑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이를 목숨으로 증명하셨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롬5:7~8). 따라서 천국의 지배는 폭력과 공포가 아닌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21)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 천국의 지혜다.
위 글은 교회신문 <710호> 기사입니다.